김해숙, ‘허스토리’서 열연… “연기인생 44년 중 가장 힘들고 슬펐죠”

▲ 영화 ‘허스토리’의 배우 김해숙이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슬픔이 너무 깊었어요.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힘들었습니다.”

중견 배우 김해숙(63)은 영화 ‘허스토리’를 끝내고 몹시 아팠다. 슬픔이 몸과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무력감이 찾아왔다. 기운을 차리려 곧바로 다른 작품에서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그 뒤로도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데뷔 44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평생 처음 겪은 경험이라 당황했어요. 저도 몰랐지만, 굉장히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나 봐요. 그 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저도 여자잖아요. 여행을 다녀온 뒤에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최근 종로구 팔판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해숙은 촬영 당시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이달 27일 개봉하는 ‘허스토리’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법정 투쟁을 벌인 실화를 그린다. 김해숙은 아픈 아들을 둔 위안부 피해자 배정길 역을 맡았다. 오랫동안 남들의 시선을 피해 살던 배정길은 일본 법정에서 그동안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아픈 과거를 증언한다.

“저 자신부터 비워야 했어요. 특히 법정 장면을 찍을 때는 그분들의 마음을 0.01%라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분들이 얼마나 속이 탔을까 생각하며 저역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죠.”

영화를 보면 김해숙은 입술이 바싹 말라 있고,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입안에서 머문다. 분노와 슬픔은 내면으로 삭인다.

“온갖 고초를 겪은 그분들이라면 매번 울면서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토록 오랜 시간 연기해온 김해숙이지만,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고, 할수록 고개가 숙여진다”고 했다.

김해숙은 1974년 MBC 7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KBS 어린이합창단 출신인 그는 고교 시절 음악 선생의 권유로 성악을 전공하려 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무남독녀인 그가 음악 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다 대입 재수생 시절 친구 따라 우연히 탤런트 공채 시험을 봤다가 덜컥 붙었다고 한다.

“연기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학창 시절 방송반을 하면서 콩트 등을 했어요. 그런 경험이 도움됐나 봐요. 젊었을 때는 잘 몰랐다가 40대 중반이 돼서야 제가 연기를 너무 사랑하고, 연기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지금까지 출연작만 100여 편. 영화 ‘희생부활자’(2017), ‘재심’(2017), ‘아가씨’(2016), ‘암살’(2015) 등 장르와 캐릭터를 가리지 않고 열연했다. 특히 온갖 엄마 역은 도맡아 해 그 앞에는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잖아요. 아직 제가 안 해본 엄마 역이 있을거예요. 모정은 똑같지만, 엄마는 다 다르죠.”

그만의 연기관도 확실했다. “엄마 역할을 하려면 근본적으로 따뜻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젊은 배우들도 사랑해주려고 노력하죠. 그들이 저를 어려워할 것 같아서 제가 먼저 편안하게 다가가려는 편이에요.”

40년 넘게 촬영장과 집만 오가며 살았다는 그는 지금도 배우로서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영화 ‘007’ 시리즈에 나오는 주디 덴치 같은 역할도 해보고 싶고, 누아르도 해보고 싶어요. 이전의 제 모습을 부숴버리는 캐릭터를 항상 갈망하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