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림, 기침, 재채기, 방귀와 같은 생리적인 현상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름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제어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채 이러한 현상들이 우리 안에서 튀어나올 때 당사자는 수치심을, 상대방은 때로 모욕감을 느낀다. 이와 달리 웃음은 우리가 유일하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생리현상일 것이다.
▲ 트림, 기침, 재채기, 방귀와 같은 생리적인 현상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름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제어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채 이러한 현상들이 우리 안에서 튀어나올 때 당사자는 수치심을, 상대방은 때로 모욕감을 느낀다. 이와 달리 웃음은 우리가 유일하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생리현상일 것이다.

요즘 코미디프로가 재미가 없다. 더 말초적이고 더 자극적이다. 여전히 외모를 비하하고 여성과 남성을 비교하여 성을 차별하고 모독한다. 이런 프로를 보고 있자니 과거의 코미디 프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숨은 의미를 읽어내야만 했던 대단한 개그 프로 두 편을 소개하려 한다.

△ ‘아메리카노’ : 코미디의 정치성

2011년 11월, 정규방송도 아닌 케이블TV에 한 소녀가 등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다운파카를 입고, 웃옷과 대조적으로 딱 달라붙는 원색의 붉은 바지를 입은 채, ‘할리라예’를 외치며 무대로 뛰쳐나왔다. 그녀의 등장은 코미디계의 지층을 흔들어 놓았으며, 그 흔들림은 우리의 삶으로 스몄다. 딱히 욕이라고도 할 수 없는 ‘간디작살’이라는 이상한 신조어의 때 아닌 열기가 그해 겨울을 휩쓸었다.

이 프로에서 ‘간디작살’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나, 일본어인 ‘간지’가 방송용어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우회하기 위해 ‘간디’를 끌어오고 있다는 것. 네이버의 오픈 국어사전에 따르면, 일본어의 ‘かんじ’(느낌)에서 온 말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폼 나다’, ‘멋지다’라는 뜻으로 전유되고 있다. ‘간디작살’은 “매력이 작살날 정도로 멋지다.”의 의미, 그러니까 “졸라 멋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때 간디는 일본어 ‘간지’를 숨기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다른 외국어가 지적 산물일 수 있지만, 유독 일본어만은 거부되고 또 저속한 어떤 것으로 이해되는 우리를 건들고 우리의 기만을 폭로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 는 언명이 그러하듯, 말할 수 없는 것은 늘 더 많은 것을 말하기 마련이다.

둘, ‘간디작살’은 단순히 “간디라는 사람이 정말 (작살날 정도로) 멋지다”라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간디(1869~1948)는 비폭력·비협력을 주장했고, 반서구주의 속에서 동양의 정신적 가치의 위대함을 설파했으며, 흰 도티(허리에 두르는 면포)로 상징되는 반근대주의와 반자본주의의 첨병이자, 앎과 행동이 일치했던 몇 안 되는 성인이다.

이런 간디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벌어진 자치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간디’라는 영화 개봉과 함께 일 것이며, ‘간디와 물레’(김종철, 1999)의 한 부분이 2004년 고등국어에 실리면서부터다. 이제 간디는 고딩이 알아야만 하는 그런 인물, 세계사 책에서는 단골 주관식이었던 스와라지·스와데시와 함께 짝을 지어 등장하는 입시용 인물로 변신한다.

교과과정에서 늘 위대했으며, 그래서 꼭 알아야만 했던, 무엇보다 시험문제를 동반했던, 이 인물은 그래서 정말 알기 싫은 인물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싫어하게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은 아마도 교과서에 그 이름을 기입하는 일일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간디작살’이 있다. 7통(7inch-17.78cm)의 바지를 입는 김꽃두레에게 간디는 오로지 말랐다는 이유로, 그래서 흰 팬티(도티) 한 장을 입어도 옷맵시가 나는, 매력이 철철 넘치는 이상적 인물로 변신한다.

안영미가 흉내 내려했던 것이 중·고딩 양아치인지 아니면, 본드나 가스와 같은 불법약물에 중독된 20대 초반의 청소년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김꽃두레는 우리가 한 번쯤은 본 것 같은 그런 소녀라는 것이며, 이들은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해왔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우리가 너무도 오랫동안 방치해왔던 그런 소녀라는 것이다.

안영미는 이 코미디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증명하고 있었던 이 아이들, 그럼에도 언제나 우리가 배제하려 했던 그런 존재를 우리 앞에 데려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이 내뿜는 악취와 그들의 고성과 그들의 패악질과 그들의 무례함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다. 안영미의 위대함은 그들을 고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그들을 ‘그들’이라고 구획하는 ‘우리’의 위선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안영미는 우리와 그들을 만나게 해 주었으며, 그들 역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들 역시 ‘우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안영미는 그렇게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켜 주었고 우리의 삶의 범위를 넓혀 주었다. 그런 점에서 안영미의 코미디는 ‘정치적’이다.

△‘10년 후’: 추락한 소망이미지

‘츤데레’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인물의 한 유형을 일컫는 말이다. 새침하고 퉁명스럽지만(つんつん[츤츤]), 알고 보면 매우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でれでれ[데레데레]), 무신경한 사람인 듯하지만 그 속은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기어이 설렁탕 국물을 사들고 들어가는 ‘운수 좋은 날’(현진건)의 김첨지, 둘리에게 매일 나가라고 구박하지만 도너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까지 자기 집에 기거하게 만드는 고길동! 알고 보면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가 그들이다.

2015년 반영된 ‘10년 후’의 조직 폭력배(권재관)가 딱 이 츤데레다. 빌린 돈을 전문적으로 받는 조폭이, 몇 달째 수금이 되지 않는 가게에 찾아 간다. 그 가게 주인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을 둔 ‘싱글맘’(허안나)이다. 조폭은 가게 주인의 처지 따위는 아랑곳 않고 가게를 뒤엎고 손님을 쫓아내며 돈을 줄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반전은 이제부터다. 10년이 지났지만, 이 조폭은 여전히 돈을 받지 못했고, 여전히 이 가게에 와서 행패를 부린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댔나? 변한 것은 조폭과 싱글맘의 관계다. 조폭의 횡포가 일상이 되어버린 이 가게에서, 주인은 물론 손님마저 돈 내놔라, 라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조폭 스스로도 이 말을 입버릇처럼 되뇔 따름으로 돈 받을 생각은 없다. 허안나와 호흡을 맞춰가며 장사하기 바쁘다.

유치원생이었던 아들은 어느덧 자라 더러 사고도 치고 필요한 것도 많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컴퓨터를 산다, 수학여행을 간다, 뭐 그런 식으로 돈을 달라고 (엄마에게가 아니라 어느 틈에) 이 츤데레 조폭 아저씨를 조르면, 조폭은 못 이긴 척 부탁을 들어주고, 이를 지켜보는 엄마는 감동한다. 이 코너는 그렇게 로맨스를 키워가다 조폭이 싱글맘에게 얼렁뚱땅 청혼을 하는 식으로 끝난다.

이 코너는 ‘츤데레 조폭’과 싱글맘의 러브스토리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 싱글맘의 자리에 우리의 삶을 대입한다면, 그 함의는 분명해진다. 이 코너의 ‘츤데레 조폭’은 백마 탄 왕자의 현대식 버전으로 읽힐 수 있다. 싱글맘의 지난한 삶을 구제하는 구원자는 멋있고 유능한 왕자의 형상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위협과 협박을 가하지만 ‘나’에게만은 친절한 그런 조폭의 형상으로 싱글맘을 찾아온다. 백마 탄 왕자의 출현은 결코 실현 불가능한 환타지로 존재한다. 물론 ‘츤데레 조폭’ 역시 백마 탄 왕자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싱글맘의 구원은 그 삶만큼이나 지난하다.

이 코너의 조폭은 백마 탄 왕자와 달리 너무 늦게 도착한다. 왕자는, 공주가 가장 꽃다운 나이일 때, 공주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고, 미래가 공주를 향해서 활짝 열려 있어 자신의 소망을 펼칠 수 있는 그런 나이에 때맞춰 등장한다. 하지만 조폭은 밀가루를 뿌려 하얗게 머리가 세고 늙을 대로 늙고, 지칠 대로 지친, 그럼에도 좀처럼 나아질 것 없는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조폭은 찾아온다. 한때 ‘백마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탄 왕자’를 꿈꿨던 우리는 ‘츤데레 조폭’의 늦은 구원 앞에서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독해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기대나 소망이 얼마나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졌는지, 혹은 (아직 추락할 것이 남았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소망이 앞으로 어디까지 멸락할 수 있는지를 이 프로는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추락한 우리의 꿈의 우의도상이다.

‘10년 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가장 절망적인 진실은 10년이 지났지만 경제적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산도 변할 수 있고 사람도 변할 수 있지만, 싱글맘은 10년 전에 진 빚을 갚을 수 없다.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사채 빚을 빌려 쓰더라도 그 빚을 갚을 수는 없다는 것, 오늘 벌어 어제를 막고, 내일 벌 돈으로 오늘을 막는 부채의 삶, 자본의 축적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이 코너는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