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청도로 거처를 옮긴 후 매년 봄날 하루는 복숭아 과수원 적과로 보낸다. 옆집 농가는 칠순을 바라보는 부부가 열 살배기 손녀를 거두며 살아간다. 그들은 복숭아와 감을 기르는 과수농사에 집중하되, 쌀농사를 포함한 온갖 작물을 자급자족하는 자영농이다. 나는 첫해부터 지금까지 그이들에게 적잖은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실감날 만큼.

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부는 지난 일요일 아침나절, 그들을 찾아 야트막한 야산 등성이를 오른다. 동네를 배회(徘徊)하는 들개를 쫓을 양으로 들고 간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볕이 잘 드는 중턱에 묘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언젠가 마을을 지키며 살았던 분들의 영원한 쉼터다. 그분들은 죽어서도 마을을 내려다보며 동리 주민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에게 영면(永眠)의 축복 있기를!

중턱의 한우농장을 지나 7부 능선에 이르러서야 일하는 사람들의 모양이 눈에 잡힌다. 옆집 양주(兩主)야 익히 아는 얼굴이되, 낯선 아낙 서넛이 사다리 위에서 일손을 재게 놀리고 있다. 머릿수건을 두르고 입마개를 하고 있어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아낙들. 오랜 세월 적과를 해온 품새가 역력하다. 나도 사다리 하나 얻어 적과에 착수한다.

4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도화(桃花)가 마을과 과수원 곳곳을 분홍색으로 물들인다. 도연명이 그려냈다는 ‘도화원기’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 즈음부터 마을에는 생기가 완연해진다. 봄기운이 자연과 인간의 사위(四圍)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때문이다. 촌에서는 계절이 바뀌었다는 느낌은 벚꽃이 아니라, 도화와 더불어 오는 법이다.

적과는 단순한 노동이지만 그만큼 고되기도 하다. 줄기 가득 매달려있는 작은 열매들 가운데 두어 개만 남기고 모조리 따내는 일이 적과의 본령(本領)이다. 문제는 선택이다. 어느 가지에는 어린애 주먹만한 열매가 대여섯 개 달려 있고, 어떤 가지에는 부실한 녀석들로 만원이다. 인간세상의 불공정과 불평등이 자연계에도 어김없이 베풀어져 있는 셈이다.

적과를 하거나, 전지(剪枝)할 때면 나는 언제나 독재자를 떠올린다. 완전한 수동자세로 나의 손가락이나 가위에 전신을 내맡기고 침묵하는 열매와 가지들. 살리고 죽이는 일, 자르고 남기는 것이 오직 나의 순간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 전지가위를 들고 다니다보면 모든 대상이 잘려야 할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여기서 독재가 나온다.

잠시 숨 돌리고 올려다본 하늘에 먹장구름이 가득하다. 가까운 곳에서 뻐꾸기 울음소리 크게 들린다. 장끼가 까투리 부르는 소리도 장단을 맞춘다. 당당하게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까마귀의 자태마저 어여쁘다. 간간이 들려오는 물소리는 바람이 몰려와서 데려가는 참나무 이파리들의 아우성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춘산(春山)의 아련한 향기가 추억을 소환한다.

“점심 하러 가입시더!” 하는 안주인의 목소리 들린다. 그이들을 태우고 경운기가 여유롭게 앞장선다. 서둘 이유도 없어 게으른 걸음걸이로 뒤를 따른다. 길가에 하얗게 피어난 찔레꽃이 내년을 기약하듯 나긋나긋하게 꽃잎 떨군다. 농장의 송아지들이 낯선 길손을 궁금한 눈길로 응시하고, 어미들은 누군가 하며 경계하는 낯빛이 완연하다.

길가 양옆에 심어진 고구마 어린순도 우쑥하고, 마늘과 상추도 생장(生長)에 여념 없다.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내 누옥(陋屋)의 붉은색 지붕이 오히려 정겹다. 뒷집 멍멍이는 오늘따라 침묵하고, 단아하게 피어난 데이지가 나를 반긴다. 성가시게 짖어대던 옆집 누렁이마저 새삼 자세 낮춘다. 봄날이 물처럼 흘러간다. 하염없이 봄날이 간다, 들뜬 꿈도 없이!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