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마지막 황제’ 등으로 친숙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2003)이란 영화가 있다. 68혁명의 소용돌이가 휘감고 있는 파리를 찾아온 미국 대학생이 경험하는 혁명과 사랑을 담고 있다. 스무 살 청춘들의 육신과 영혼을 통해 지난 세기의 위대한 사건을 추억하는 ‘몽상가들’. 에바 그린의 데뷔작으로도 유명한 영화였지만 불과 4만의 한국관객을 불러모으고 조용히 사라진 ‘몽상가들’.

수많은 사회학자, 정치학자, 철학자와 예술가들의 영감과 두뇌를 자극했던 68혁명. 기성세대의 속물근성과 탐욕, 부패와 타락을 비웃으며 “상상력에게 자유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68혁명.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강타하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진출한 68의 물결은 급기야 태평양까지 돌파한다. 1969년에 결성된 일본 적군파와 전공투를 기억한다. 예일대 석좌교수인 임마누엘 월러스틴은 ‘유럽적 보편주의’에서 사회과학의 혼란과 부진의 시원(始原)을 68혁명에서 찾는다. 혁명의 발발원인과 경과, 그것이 실현하고자 했던 목표지점마저 온전히 해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과학의 득세와 인문학의 정체, 사회과학의 무기력증이 21세기의 지배적인 흐름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추세의 원년을 68에서 보고 있는 월러스틴은 우리 시대의 과제로 세 학문의 통합을 주장하기도 한다.

각설하고,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프랑스와 도이칠란트의 위대한 대학교육과 무상교육은 68혁명의 결과 가운데 하나다. 정치적인 후각과 활동성에서 첨단을 달리는 프랑스의 선택은 소르본느를 포함한 파리의 모든 대학을 숫자로 표기하는 것이었다. 특권의식과 엘리트 교육에 반대했던 당대 20대의 열혈투쟁이 야기한 대학서열 철폐!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위계질서에 순종하지 않고 새로운 지배질서와 담론을 창출해낸 20대의 혈기방장과 미래기획!

68혁명은 좁디좁은 현해탄을 건너지 못하고 일본에서 장렬하게 산화한다. 김신조로 대표되는 1·21사태와 실미도 부대로 알려진 684부대 창설, 그리고 ‘1968년 대통령 박정희’로 끝나는 국민교육헌장과 3선개헌 준비 등으로 한반도 남단은 침묵을 강요당한다. 우리에게 68혁명은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였다. 그러다가 불쑥 닥쳐온 80년 서울의 봄과 87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어쩌면 그것은 68혁명의 아련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혁명은 언제나 세상과 역사의 혈관을 맹렬하게 뛰게 한다. 혁명은 답답하게 막혀있던 혈로를 뚫어줌으로써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혁명의 근원은 언제나 청춘이었다. 정치 권력이나 경제 권력 혹은 문화 권력을 탐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청춘은 불의하고 부당하며 폭력적인 기성질서를 대번에 전복시킨다. 그들의 불타는 눈동자와 탄탄한 육신과 목울대의 팽팽한 긴장은 신질서의 태동을 예비한다. 혁명이 없는 세상과 역사는 좀스럽다. 혁명의 약동을 경험하지 못하는 청춘은 이미 푹 늙어버린 젊음에 지나지 않는다. 20대 얼굴과 육신에 80대의 영혼과 무기력이 꼴사납게 얹혀 있는 형상이다. 2018년 시점에서 한국의 청춘은 우울하다. 미래기획과 야망이 사라진 자리를 일자 걱정과 최저임금과 학점이 대신한다. 전면전을 불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외라는 허망한 희망을 붙들고 있다.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나는 5월. 눈보다 희고 피보다 붉고 창천(蒼天)보다 푸르른 5월. 해마다 그 5월을 매메한 최루탄으로 보내야 했던 인간 암모나이트. 그 시절 자유롭지 못한 영혼이나마 치욕과 자의식으로 숱한 밤을 지새운 청춘들의 머리에 어느새 무서리가 내렸다. 그렇게 세월이 세상이 관계가 추억이 하나둘 멀어져간다. 그러하되 5월이 오면 언제나 68과 나의 지나가 버린 5월들이 아릿한 추억과 함께 되살아나는 것이다. 아, 5월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