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서예가
▲ 강희룡서예가

유가의 공자사상처럼 사람을 가르치거나 국가를 다스릴 때는 믿음을 우선시하며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혹은 국민과 국가 사이, 지역과 지역사이에 불신만 가득 차있다.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리는 엉킨 실타래를 풀 때 급히 서두르다 보면 실타래가 더 꼬이고 엉켜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시간을 두고 침착하게 일일이 풀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사회정의론에는 다양한 이론들이 존재한다. 미국의 대표적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사회 제도의 제1덕목은 정의라고 밝히고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정의에 있어 옳음이 좋음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공정을 중요시했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평등한 시민적 자유란 이미 보장된 것으로 간주되며, 정의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은 어떠한 정치적 거래나 사회적 이득의 계산에도 좌우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원초적인 입장에서 합의된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주장한 것이다.

마이클 센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2010)’에서 ‘의무론자들이 중요시하는 개념은 옳음이며, 결과주의자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좋음’이라고 했다. ‘옮음의 근거는 이성이며 이성에 근거를 둔 원칙이 옮음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고, 좋음을 규정하는 것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가치관 혹은 관습’이라고 했다

정의는 개인의 정당한 몫을 배분해 주는 것으로 이해가 상충되는 당사자들을 어느 한편을 일방적으로 부당하게 희생시키지 않고, 모든 당사자의 이익을 공정하게 고려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때 무엇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절차를 중시하는 입장과 실질(결과)을 중시하는 입장이 있기에 전자를 절차적 정의 또는 형식적 정의라고 하고, 후자를 실질적 정의라고 부른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1998)’은 ‘국가와 시장의 협력’으로 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모두 극복하겠다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담은 책이다. 미국의 클린턴 정부나 영국의 블레어 정부가 제3의 길을 표방했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시장경제의 정착, 생산적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국정지표를 내건 DJ정부 역시 ‘제3의 길’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제3의 길은 외환위기 이후 금융세계화와 시장개방, 구조조정을 거치며 겪게 된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체제로 굳어졌고, 지금의 더욱 심화된 불평등의 씨앗을 뿌렸다.

정의와 공정의 축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한국 사회에 반칙이 횡행하는 토대를 제공하는 건 다름 아닌 정치권과 교육 당국, 법조계이다. 학생부 조작, 교육부의 설익은 개편안, 미성년 자녀의 논문 공저로 끼워넣기, 한 사건이 판사의 성향에 따라 유무죄로 판결나는 사례, 강원랜드 채용비리 관련 수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기존 약속을 깬 검찰총장의 모호한 태도, 정치검찰, 늘 문제시되어 온 재벌들의 갑질, 더구나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비극을 낳은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력 등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국민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역시 자살률이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28.7명으로 회원국 중 1위다. 2위인 일본(18.7명)과도 격차가 크다. 한국은 2003년 이후 한번도 1위를 타국에 내준 적이 없다.

영욕에 눈먼 자들이 설치는 국가가 되어서는 사회정의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혼란과 절망 속에서도 사람 간의 신뢰만이 지금의 불신과 단절을 끊을 수 있는 열쇠가 되리라 믿는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스스로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고 있을 자리가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