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서예가
▲ 강희룡서예가

조선조에는 각 개인이 접하는 사회적 범위가 넓지 않아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굳이 장광설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알아서 인정해 줬기 때문이다. 현대를 자기표현의 시대라고 한다.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광고를 위해 열심히 연설을 하고 있고 글을 쓰거나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린다.

그런데 자신을 내세우는 말을 살펴보면 보편타당한 진리에 입각해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사리와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은 경우가 많다. 또한 자신의 주장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 현란한 용어를 사용하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독설을 퍼붓는 경우도 있다. 모든 정보가 공개되며 확산이 아주 빠른 오늘날에는 자신의 언행 가운데 잘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는 반면, 잘못한 것은 순식간에 퍼져 도리어 자신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한마디 언행의 실수로 자신이 평생 이뤄 온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의 선인들은 말을 함에 신중하고 간략하게 말하고 때에 맞게 말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또한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면서 행실에 맞게 말을 하여 언행일치가 되도록 하는 것을 아주 중시했다. 자신의 행실은 엉망이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말을 늘어놓는 것을 못난 사람의 전형으로 보았다.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형성된 당파는 숙종 때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인현왕후의 폐위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엎치락뒤치락 정권을 차지하는 이른바 환국(換局)이라는 것이 몇 번이나 있었다. 서인은 다시 남인에 대한 처벌 여부를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갈린다. 이즈음의 환국은 단순히 정권만 바뀌는 것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상대편의 목숨을 뺏는 핍박이 이어졌다. 이 모두가 서로 일면적인 관점에서 비판하고 항쟁하는 집단인 당파로서 보편적 진리를 스스로 인정하면서 상대 당파를 진리가 아니라고 무화(無化)하고자 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농은 윤추(1632∼1707)는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아우다. 당시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행적 기술과 관련해 그 스승인 송시열과 사제의 의리를 끊을 정도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윤추는 당쟁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조정의 지배층은 백성은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정권탈취와 정적들의 도륙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지방의 수령들은 이런 중앙의 혼란을 틈타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이런 상황을 직접 목도한 윤추는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의 저서 ‘농은유고’에서 이런 위기감을 아버지의 제자인 나양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다.

서원과 종사, 문묘가 모두 난잡해 분란이 이미 극에 달하여 벼슬아치들의 가렴주구가 도를 넘고 있다는 걱정과 동한(東漢)의 경우 이렇듯 위아래가 썩어 어지럽더니 결국 나라가 망한 것을 예로 들며 걱정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의 당쟁보다 더 심한 대립과 갈등이 이 나라를 휩쓸고 있다. 그 당시는 소수 지배층만의 문제였지만 이젠 전 국민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당쟁의 주체로 참여하고 있다. 짧고 평범해 보이는 편지내용이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시대의 상황이 결코 그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보매체의 발달을 통해 소통을 기대해보았지만 지금의 ‘드루킹 사건’처럼 댓글이나 여론조작을 통해 정작 상대에 대한 무시와 편견만이 확산되고 있다. 일부는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이단이라는 종교적 맹신도와 같은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지금의 형세는 자신들의 권력 욕심을 채우기 위한 위선적인 몸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엄정한 법이 본질을 벗어나지 말고 진실을 밝혀 사회의 정의를 세워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