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bR>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전국이 시험 기간이다. 그래서인지 집 근처 독서실에 자리가 없다고 한다. 아마도 전국 독서실이 만원(滿員)이 아닐까 싶다. 독서실과 그 주변 편의점들이 소위 말하는 시험 특수를 누리고 있다. 물론 필자도 학창시절에 시험 특수에 한 몫 했었다. 그때는 독서실 가는 것이 마치 의무처럼 느껴졌다. 시험 점수를 떠나 독서실을 가야지만 마음이 안정 되었고, 억지 같지만 독서실에 있는 순간만큼은 부모님께 최고의 효도 선물을 드리는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물론 독서실에 있는 시간 전부를 책과 함께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때 공부한 내용은 솔직히 지금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은 독서실 매점에서 먹은 컵라면 맛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때는 분명 지금보다 더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슴에 불을 지필 뭔가가 존재했었다. 필자의 불쏘시개는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였다. 정말 모든 힘을 다해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의 모습은 필자가 공부를 해야만 하는 주술과도 같은 이유였다. 그리고 고등학교라는 힘든 길을 3년 동안 함께 동행 해 주시며 스승의 참사랑을 깨닫게 해 주신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지금도 필자와 관련한 신문 기사들을 스크랩하고 계신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는 과연 어떤 이유와 동기가 있을까. 우리 아이보다 내 아이만 생각하는 학부모, 시험 성적으로 직업인이 되어버린 교사,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경쟁자 친구! 어렵게 독서실 자리를 잡아 처진 어깨로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에게 왜 공부를 하는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나간 현관에서 ‘그나마 자신이 하고 싶은 직업이 생겼고, 그 직업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특정 대학에 꼭 가야 하는데, 그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내신이 어느 정도까지 필요하고, 내신이 곧 학교 시험이니 힘들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딸아이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들리는 듯 했다. 현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필자에게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따지듯이 물었다. “아빠, 시험이 공부야? 공부가 꼭 시험이어야 해? 학교는 시험 빼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근데 아빠는 시험 문제 왜 내?”

아이의 말에 필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 했다. 아이의 말처럼 이 나라에서 공부는 언제부터인가 시험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시험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은 공부는 공부도 아닌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시험에 대한 이런 생각은 학생, 학부모는 물론 교사들까지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공부가 재미있을 리 없다. 시험 학교에서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해서 웅크린다고 한다. 밤을 밝히며 독서실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들! 과연 그들이 뛸 수 있는 높이는 어느 정도일까. 또 그들이 뛸 곳은 어디인가? 모든 것을 떠나 아이들은 왜 그렇게 웅크리고 있어야만 할까?

교육청에서는 “배움이 즐겁고 나눔이 행복한 인재 육성”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평가 방법을 수정하고 있다. 2018년 학업성적관리 지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교과의 수행평가 반영 비율은 학기말 배점 기준 50% 이상이 되도록 한다. 이 때 수행평가는 과정중심 평가를 원칙으로 하며, 서술형 평가를 학기말 배점기준 20%를 포함한다.”

세상에 나쁜 이론은 없다. 문제는 그 이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위의 지침에 나와 있는 내용도 좋은 내용이다. 하지만 형식만 그럴싸할 뿐 실제는 아이들에게 더 극심한 시험 피로를 주고 있다. 아침에 나간 아이는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다. 말할 힘도 없다고 했다. 시험만 끝나면 모든 것이 잊혀 질 잡다한 휘발성 시험 지식을 외우느라 고생한 아이에게 필자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시험 특수 기간에 싸구려 시험까지 팔아버릴 수는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