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이 있다. 강자들이 싸우는 통에 약자가 중간에 끼어 피해를 입는다는 말이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1885년 천진조약을 체결한다. 그것은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에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고종은 ‘민자영’의 척족세력 우두머리 민영휘의 조언을 받아들여 청나라 ‘원세개’에게 구원병을 요청한다.

천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대보다 먼저 경복궁에 입성한 일본군은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일으켜 8월 초에 아산, 공주, 성환 등지에서 청군을 격파한다. 여세를 몰아 9월 중순 평양에서 청군을 패퇴시킨 일본군은 조선내정에 깊이 개입한다. 자주적인 통치능력과 기반을 상실한 조선왕조는 동학농민군을 비적(匪賊)으로 규정하고 외국군대를 들여와 척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0만여 농민군이 장렬하게 전사한 우금치 싸움은 오늘도 인구에 회자된다.

조선을 둘러싼 양대 세력인 청과 일본 사이에서 처절한 죽음을 맞았던 동학 민초들의 비애가 아프게 다가온다. 호사가들에 따르면 한반도는 역사 이후 대륙과 섬으로부터 900여 차례의 외침을 겪었다 한다. 고구려와 수당전쟁, 몽골침략과 고려의 항쟁,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기억하시라. 임란과 을사늑약,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도 잊어서는 아니 될 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우리는 대륙과 섬으로부터 끝없는 침탈을 받아왔다. 그래서 자연스레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에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17일 ‘사이버 민간 외교사절단’ 반크는 한국사를 왜곡하는 외국의 사례를 시정하는 작업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었다.

반크는 ‘아시아소사이어티’나 컬럼비아 대학교 등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한국을 ‘중국과 일본, 러시아 같은 고래 사이에 낀 새우’로 묘사하고 있어서 이것을 바로잡는 동시에 긍정적인 한국사를 알려 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들 세 나라에 미국을 더하면 한반도를 둘러싼 이른바 4대 강국이 제 모습을 갖추는 형국이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 한반도의 정치-경제적인 지형과 2018년 한반도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명-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했던 조선왕조와 21세기 대한민국은 전혀 다르다. 세계 15위 내외에 포진한 경제 강국이자, 문화와 정보통신으로 세계인의 입길에 오르는 나라. 분단을 둘러싼 혼란과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와 상생을 열어가려는 국민과 정부의 노력이 진행되는 나라. 재벌로 대표되는 부도덕한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려는 열망이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역동적인 대한민국.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만 모른다. 우리가 더 이상 새우가 아니라, 최소한 돌고래 수준이라는 것을!” 그것은 장구한 세월 대륙과 섬으로부터 잦은 외침과 수탈을 일상적으로 겪어온 비운(悲運)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온 천형(天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하되 이제는 그런 부정적인 인식과 자괴감을 던져버려야 한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큰 나라 눈치 보는 관습은 패대기칠 때도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2차 대전 이후 성립된 신생국 가운데 정치적인 민주화와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 유일무이한 국가의 국민으로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서다. 데모랍시고 성조기 흔들며 굽실거리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수치심이 그토록 역겨운 것은. 돌고래 수준의 정치제도와 실행절차, 자부심 넘치는 역사의식과 미래기획이 한반도에 넘실거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것이 위대한 4·19 혁명 58주년을 맞이한 나의 소박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