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살며 생각하며 (10)

파스칼은 잘 알려진 수학자요, 종교철학자요, ‘팡세’의 저자이기도 하다. 어찌어찌한 일로 파스칼의 책 중에 ‘파스칼 소품집’이라는 것을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세 번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청산서림이라는 곳에서 1960년에 출간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입문사에서 1974년에 나온 것이다. 하나는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정음사 판 ‘파스칼 소품집’이다.

인터넷 헌책방을 통해 이 책을 구하려 하니, 뜨는 것은 청산서림 판 심재언 옮김 ‘파스칼 소품집’, 가격은 1만5천원, 배송비까지 해서 1만7천500원이다. 이 책이 한 사흘만에 날라왔는데 정작 내가 원하던 그 ‘로아네 남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장은 없다. 꼭 이 장을 찾는데는 이유가 있다.

같은 ‘파스칼 소품집’인데, 정음사 판에는 있는 그 장이 여기에는 없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다. 그렇다면 이 ‘파스칼 소품집’들은 역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편집, 번역된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정음사 판 ‘파스칼 소품집’ 목차를 도서관 웹사이트를 통해 찾아보니 다행히 있다. 그것은 파스칼이 로아네 남매와 신앙 문답을 주고 받은 아홉 편의 서한이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하나 읽어 본다.

“우리는 우리의 지난 과오를 뉘우침으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과거는 조금도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미래는 그보다 더 우리를 다치지 말아야 하지요. 왜냐하면 미래는 전혀 우리의 소관사가 아니라, 아마도 결코 그리 되지 않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야말로 진정 우리에게 속하며 신의 뜻에 따라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주로 문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현재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너무나 불안하여, 사람들은 현재의 생각이나 현재 살고 있는 순간을 생각하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 살게 될 순간을 생각하려고 듭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언제나, 결코 현재에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살고 있다는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우리의 예견이 우리가 놓여 있는 당일보다 더 멀리까지 뻗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휴식을 위해서 지켜야 할 경계선이지요.”

또다른 문장 하나.

“만약 신께서 계속적으로 인간들에게 드러나 보이신다면, 그를 믿음이 조금도 공이 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신께서 한번도 드러나 보이지 않으신다면, 믿음이란 거의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께서는 여느 때는 숨어 계시다가 자신을 섬기도록 하시려는 사람들에게 드물게 드러나 보이시는 것입니다. 신께서 그 안에 잠적하고 계시는 이 기이한 비밀, 인간들이 봄에는 불가해한 이 비밀은 인간들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진 고독으로 우리를 이끌고 갈 수 있는 큰 교훈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렵고도 혼란스럽다. 무엇에도 믿음을 품기 힘든 때, 자신의 과거에도, 미래에도 확신을 갖기 어려운 때다. ‘나’는 얼마나 참된가? ‘내’게 신의 빛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깃들어 있는가? 신은 자연이며 세속 바깥의 숭고한 진리일 것이다. 자신을 채찍질하여 구원을 갈구하던 파스칼의 ‘고행’을 생각하게 된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