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조선왕조에서는 인사행정을 일컬어 도목정사(都目政事)라고 했다. 이조와 병조의 인사 전형위원회에서 적격자 3명을 선발한 뒤 왕에게 올리면 왕이 최종적으로 한명을 낙점하고 이를 오늘날 신문이라 할 수 있는 조보(朝報)에 공표한다. 공표했다고 곧바로 관직에 취임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직후 이조와 병조에서 해당자의 친족·외족·처족 등 3족의 아버지·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증조와 외조의 명단을 사헌부와 사간원에 보내 결격 사유의 유무를 판정받아야 했다.

이 절차를 서경(署經)이라 하는데 이 서경을 통과한 사람이어야만 취임을 승인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서경에 걸려 고위직에 나가지 못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조상들의 잘못 보다는 자신의 탐학이나 음욕이 문제가 된 것이 더 많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뇌물로 들깨 한 섬, 쌀 두 말 닷 되를 받았던 것이 화근이 됐던 인물도 기록되어있다.

19세기 개화사상을 폈던 최한기(1803~1877) 선생은 23년의 연구 끝에 내놓은 그의 저서 `인정(人政)`에서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인 치인술을 논하면서 세상의 인품을 다섯 가지로 분류해 놓았다. 첫 번째는 질새(窒塞)로 선한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그 수가 가장 많다. 여기에 속한 이들은 빈부귀천 등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선한 말을 듣지 않는다. 다시 말해 `꽉 막힌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많은 부류는 큰 말은 받아들이지 않고 작은 말에만 귀 기울이는 소기(小器)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편벽된 소견을 가지고 간신히 제 몸을 보전하는 데만 바쁜 사람을 말한다. 그 다음이 선한 도를 스스로 깨닫는 통달(通達)이다. 이 통달은 견식이 막힘이 없고 언론이 분명하며, 일을 하는 데도 빈틈이 없고 이웃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지낼 줄 안다. 다음으로 작은 말은 버리고 큰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대기(大器)라 했다. 이 대기는 드물지만 큰일을 맡고 그 업을 이루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인재들을 말한다. 끝으로 큰 말을 들어 크게 쓰고, 작은 말을 들어 작게 쓰는 불기(不器)가 그것이다. 도덕과 재능이 뛰어난 이 불기의 사람은 천하에 구하기가 쉽지 않고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가려내기조차 어렵다.

지난 왕조시대의 임금들도 자신을 위해 오래 헌신한 사람들을 국정의 주요 자리로 대동하지 않았으며 인재를 널리 찾아 엄격한 심사를 거쳐 발탁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통치에 필요한 공인으로서의 인재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447년 세종은 과거시험의 주제를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하며 분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논하라`로 결정해 출제했다. 이 과거에서 장원으로 뽑힌 사람은 18세의 강희맹(1424~1483)이었다. 강희맹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여색과 재물을 밝히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후자이며,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이 없으므로 청렴한 사람을 적합한 자리에 기용하여 능력을 키워주면 스스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 하였다.

실제 세종은 `교화하며 쓴다.`는 인재경영론을 펼쳤다. 또한 세종은 인재가 길에 버려져 있는 것은 나라의 수치라며 지역, 신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기회를 줬던 것이다. 이 정책으로 역사상 유독 엄청난 인재가 쏟아진 시기가 이때이며, 당시 발탁된 인재의 임무는 직언극간(바른말로 잘못을 극진히 간함)이 최고 덕목이었다.

다가오는 6월 지방선거에 참신한 인물들을 영입하지 못하고 후보자 인물난으로 올드 보이들이 귀환하고 있는 제일 야당을 보면, 공손연의 의기를 생각나게 한다. 전국시대 위나라의 명재상 공손연은 `의리는 줄지어 나는 기러기와 같고, 차례는 꼬치에 꿴 물고기와 같도다`라며 의리를 내세워 자기편만 조정에 줄 세워 끌어들이는 당시의 인사를 비판했다. 인재발탁과는 거리가 먼 기준으로 후보자를 찾으니 인재는 안보이고 인물난을 겪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