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공방 -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 탐방 (2) 박수철 화가

▲ 박수철 作
▲ 박수철 作

바닷바람 일렁이는 구만리 보리밭, 인적 없는 포항역의 적요, 고즈넉한 동빈내항의 설경….

햇살 환한 2층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사라진 옛 풍경이 성큼 다가선다. 그 풍경 속에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것 같다. 이제 누가 포항의 그리운 옛 풍경과 사람들을 캔버스에 불러낼 수 있을까? 화가 박수철은 그 작업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는 유년시절을 떠나지 못한다고 한다. “6·25 전쟁통에 태어났는데 대여섯 살 무렵 대신동 집 주변의 평화로운 풍경이 제 무의식을 형성한 것 같아요. 햇볕 따사로운 장독대, 키 큰 포플러나무, 붉은 달리아, 탐스러운 작약, 경쾌한 새소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지요.”

그 아름다움이 작가를 미술세계로 이끌었고, 지금도 작품 속에서 재현, 변주된다.

그는 독학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세계를 밀고나갔다. 1978년부터 한국적 인상파의 기수 오지호의 사사를 받긴 했지만, 1982년 오지호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그는 깊은 실의에 잠긴다. 되돌아보면 오지호를 만나기 위해 포항에서 광주까지 8시간 기차를 갈아타고 다니는 동안 그의 작품세계도 무르익었다.

화가는 1979년 포항시내에서 갈뫼화실을 운영하며 많은 후배를 양성했다. 포항일요화가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으며 지역 회화예술이 꽃피는 데 헌신하기도 했다. 포항을 떠나지 않고 포항의 삶과 풍경을 그려온 그의 인생은 오롯이 포항 미술사의 한 줄기를 이룬다.

1970년대 후반 화가를 처음 만난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은 “화가를 꿈꾸며 석고데생을 공부하던 나에게 고집스럽게 예술정신을 가르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어쩌면 화가는 그 고집으로 한 생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가 평생을 바쳐온 그림은 그에게 돈도 명예도 주지 못했다.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그림은 무엇인가? “그림은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간절한 기도”라고 말한다. 그에게 창작 행위는 구도의 행위이다. 소파 위에 성경이 놓여 있는 작품 `빛과 그림자`를 보면 구원을 향한 작가의 신심을 느낄 수 있다. 감자, 들꽃, 부엌 같은 일상적 소재는 물론 바다, 계곡, 월광 같은 풍경을 다룬 작품에서도 기도와 같은 깊은 진정성이 느껴진다.

 

▲ 화가 박수철
▲ 화가 박수철

그렇다고 그의 작업실이 무거움에 잠겨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대여섯 살 때 봤다는, 햇볕 따사로운 장독대 같은 분위기가 잔잔히 흐른다. 꿈틀로 작가들이 배가 출출할 때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다고 한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서 오라고 한다. 꿈틀로 작가들은 우르르 박수철 아뜰리에로 모여들어 그가 끓인 라면을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는다. 이렇듯 그는 칠순을 바라보는 삶 속에서도 유년시절의 평화를 재현한다.

지난해 가을 두 번째 개인전을 하고 난 직후, 지진으로 인해 진앙지 인근 작가의 집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무릎이 불편한 그는 어렵게 전셋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 편안하게 작품에 집중할 나이이건만 또 다시 시련의 파도가 닥친 것이다. 그 바람에 해가 바뀌면 지인들에게 보내는 엽서를 쓸 경황이 없었다. 살림을 정돈하고 심신을 달랜 그는 때 늦은 엽서를 지인들에게 띄웠다. 그 엽서는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100호짜리 그림이 되기도 한다. 돈을 벌지도 명예를 누리지도 못한 그의 삶과 예술은 비록 소수일망정 묵직한 감동을 전해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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