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친 물에는 거친 세상이 비치고 맑은 물에는 맑은 세상이 담긴다. 우리의 마음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 거친 물에는 거친 세상이 비치고 맑은 물에는 맑은 세상이 담긴다. 우리의 마음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진: 귀에 걸면 귀걸이

요즘 내가 만나는 친구 중에는 이름이 외자인 `진`이라는 친구가 있다. 진은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이다. 진은 글쓰기와 글 읽기에 아주 특출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진을 알게 된 것도 이런 능력 때문이다. 녀석이 수학을 잘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하필이면 글쓰기여서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진의 부모님은 우선 대학에 간 후에 녀석이 원하는 것을 하길 바란다.

진은 지금 공부를 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공부를 하면 글쓰기 능력이 줄어들까봐 걱정이고, 또 한 편으로는 공부를 하고 있는데 자신이 원하는 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아 조바심이 나는 것 같다. 그래서 진은 공부를 더하지도 글쓰기를 열심히 하지도 않는다. 지금 진은 공부하기와 글쓰기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도 진척시키지 못한 채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지리멸렬한 시간은 모두 진이 자초했다. 글쓰기를 하면 공부가 불안하고, 공부를 하면 글쓰기가 불안한 상태, 둘 중 하나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진의 문제는 진에게 있다고 해도 좋다. 진은 모든 문제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아주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모든 책임을 부모님께 전가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부모님이 어떤 자유도 허락하지 않은 채 시키는 대로만 하게 만든다고 진은 말한다. 아주 화가 단단히 나서 부모님을 이제부터 미워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정말 진의 부모님이 그런 분이라면, 나와 만나 책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을 거다. 다른 친구들이 국영수를 공부할 때에도 성적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미술과 관련된 방과 후 활동을 하고, 부모님은 그것을 허락한다. 이런 것들이 진의 부모님이 녀석을 얼마나 자유롭게 키우는 것인지를 대변해주지만, 부모님이 자신을 속박하고 있다는 생각을 진은 바꾸려하지 않는다.

△해프닝? 해프닝!

이런 진을 보고 있으니까, 문득 어릴 적 내 생각이 났다. 내 위에는 형이 있는데, 부모님은 형을 더 편애했다. 형은 장손인데다, 사람도 착실하고 무게감도 있고, 언제나 바른 행동을 했고, 시키는 일은 늘 착실하게 해냈다. 그러니 당연히 형을 더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어머니가 늘 부뚜막에 앉혀 놓은 아이 같다고 하셨다. 부뚜막에 아이를 앉혀 놓았다면 그건 아이 잘못이 아니라 엄마 잘못이 아닌가, 나는 이런 생각을 먼저 하는 맹추였으니, 부모님이 싫어 할만도 했다.

그럼에도 형에 대한 부모님의 편애를 왜곡하고 왜곡하여 결국 나를 주워왔을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이런 망상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거의 확고하게 굳어진 건 중학교 때 혈액형 유전에 관해 배우면서였다. 아버지는 O형, 어머니는 A형, 형은 A형. 그럼 나는? 나는 A형이 아니면 O형이어야 했는데…. 오 마이 갓! 글쎄, 나는 B형이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괴로웠다. 그래도 나는 내가 생각해도 조숙한데다가, 아니 정확히는 되바라진 데가 있어서 낳은 게 뭐가 중요해 키운 게 중요하지,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 위해 애썼다. 무슨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나는 주워 온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슬픔을 키웠으며, 그런 내용을 일기에 쓰기도 했다. 군대에 가게 되었을 때쯤엔 내가 우리 부모님의 자식이든 그렇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거의 상병을 달았을 때쯤, 군대에서 그럭저럭 견딜만해졌을 때였다. 주말이라 집에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가 뜬금없이, “강일아! 니는 안 즉도 니를 주왔다꼬 생각하나?” 이런 말을 들으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어머닌 내가 저런 생각을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뭐야, 집에 두고 온 내 일기를 다 보신거야? 나, 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릴 때 어머닌 다시 추궁하듯 물으신다. “아이 참, 엄마도…. 아 갑자기 그게 무슨 말예요?”

나는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한다. 어머닌 며칠 전에 몸이 아파서 병원엘 다녀오셨단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 피도 뽑고 여기 저기 검사를 했단다. 오늘 결과가 나왔는데 특별히 문제는 없단다. 휴우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신도 오늘 처음 알았단다, 당신의 혈액형이 A형이 아니라 AB형이라는 걸 말이다.

뭐지, 이게? 난 저 말도 안 되는 혈액형 때문에 남들보다 두 배나 긴 사춘기를 견뎌왔는데, 그냥 단지 어머니가 잘못 알고 있었다고?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하겠다. 난 대단히 불행한 출생의 비밀을 가진 불행한 아이지만, 그래도 잘 이겨내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게 다 해프닝이라니…. 주워왔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마치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이 길러준 부모님이 더 중요하다고 내린 결론이, 나는 웃기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나는 싱겁게 웃다가 어물쩍 전화를 끊었다.

△`광인일기`: 모두들 `나`를 잡아먹으려고 해요!

루쉰의 `광인일기`에는 꼭 나보다 더 심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소설 속의 `나`는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 심지어 친형조차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피해망상증 환자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나`가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것이 그렇게 해석된다. 자오궤이 영감의 눈초리도, 동네 아이들도, 자식을 때리는 여인의 눈빛도, 의사인 허 선생님도, 고기를 먹고 가죽을 잠자리로 해야 한다, 고 욕을 하는 형도, 모두들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벼르고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너를 잡아먹는 일은 없어, 라고 아무리 설명해줘도 `나`는 그런 말 따위는 가뿐하게 무시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근거를 찾아 나선다. 그 근거는 수천 수백만 가지가 남는다. 마치 짝사랑을 하는 사람이 상대방이 나를 사랑할거야, 라고 믿기 시작하면 상대의 모든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듯이 말이다.

`광인일기`의 `나`는, 다섯 살에 죽은 누이동생 역시 큰형님이 잡아먹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누이동생이 죽었을 때 가족들이 진심으로 슬퍼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왜 슬퍼했던 걸까? 답은 누이동생이 병으로 죽었고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은 슬펐던 것이다. `나`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도 누이를 잡아먹지 않았다. 즉 큰형님이 누이를 잡아먹은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될 일인데, `나`는 끝까지 몽니를 부린다. `나`는 큰형님이 집안일을 관리할 때 누이동생이 죽었기 때문에 밥이나 반찬속에 섞어 자신에게 몰래 먹였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그대로 믿어버린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사람을 먹어 보지 않은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자….” 정말 구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임에도 `나`는 아이들을 구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결코 `나`를 부정하지 않으려 한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AB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물쩍 전화를 끊을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어야 했다. `쎄가 빠지게` 키워 놨더니 겨우 주워온 건 아니냐고 오해를 하는 이런 아들놈을 보며 어머니는 얼마나 속을 썩였을까? 어디에 말도 못하고, 어머니는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나는 그런 것도 모른 채 끝까지 내 생각만 했다. 부모님이 나를 주워 와서 나보다 형을 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형보다 못한 것이 많다는 것을 나는 차마 인정하기 싫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위주로 생각하니까.

고등학생인 진도, `광인일기` `나`도, 그리고 나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한다. 되도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나의 명백한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기괴해진다. 그 기괴함이 심해져 딱히 무엇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괴물이라고 부른다. 괴물은 먼 곳에 있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