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인문대학 노문학과
▲ 김규종 경북대 인문대학 노문학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대통령 특사일행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오는 4월 말경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두 손을 맞잡는다는 이야기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분단이후 남한 땅을 밟게 되는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온다.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한 이후 남북관계에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기다리던 좋은 징조(徵兆)다.

지난 연말 북한의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 사이에 오갔던 가시 돋친 설전(舌戰)이 생각난다. 일촉즉발의 전운(戰雲)이 시커멓게 뒤덮였던 한반도에 대화와 소통, 평화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이 유지해왔던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는 전통적인 외교전술이 근본적으로 뒤바뀌고 있는 듯하다. 남한을 고립시키면서 미국과 교통하려는 그들의 저의는 지난 세월 온전히 작동하지 못했다. 외려 북한의 대내외적인 고립양상이 심화한 형국이었다.

돌이켜보면 1990년 한국과 러시아,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우리나라의 경제와 외교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미국과 일본, 유럽 일변도로 이루어지던 대외수출의 다변화와 함께 변화된 세계정세의 일익(一翼)을 우리가 담당할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일컬어지는 한러-한중수교는 한반도 남단(南端)에 머물러있던 한국인의 좁은 시야를 일거(一擧)에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일대 전환점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가 누렸던 정치적-경제적-외교적 이익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로 이어지는 외교관계에 우리가 무리 없이 안착(安着)한 반면, 북한은 한국과 일본, 미국으로 이어지는 동맹관계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방정책으로 러시아와 중국과 교통한 정도로 만일 북한이 일본과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생각해본다. 수백만 인민이 아사(餓死)했다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같은 것은 없지 않았을까?!

흥미로운 점은 남과 북의 화해와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아베총리를 비롯한 일본조야(日本朝野)가 불편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적인 대북압박과 통제로 북한의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실현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복안에는 북한을 빌미로 한 군사대국화의 야심이 숨어있다. 북한이 지속적인 핵실험이나 도발을 꾀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처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일본을 탈바꿈하겠다는 것이 아베의 원대한 숙원(宿願)이었다.

일본은 일찍부터 한반도와 대륙을 향한 야망을 불태운 집념의 나라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일본은 661년부터 663년 8월까지 약 5만에 이르는 정병(精兵)을 백제에 파견한다. 일본이 백제 부흥군을 도와 금강하구 부근에서 당나라 군대와 벌인 접전을 `백강전투`라 부른다.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다시 한 번 한반도를 향한 야욕(野慾)의 불길을 당긴다. 7년의 전란이 가져온 폐해는 그야말로 막심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시작으로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거치면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들이 식민지배(植民支配)를 일삼던 동안 한반도에서 자행(恣行)한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2차 대전의 패망 이후에도 일본은 호시탐탐 한반도의 명운(命運)에 개입하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독도와 위안부 문제로 일본과 대치하고 있다.

아베와 일본정부가 한국과 북한의 화해와 대화에 찬물을 끼얹고 헤살 놓으려는 데에는 자국의 외교적 목표와 국가주의 전략이 내재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남의 잔칫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일본과 아베의 야욕을 분쇄하고 한반도 평화를 굳게 다져나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