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영 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80년대 노동시인으로 열악한 노동현장과 불구의 시대현실을 고발한 생생한 육성시를 들려주었던 시인의 비교적 참참한 어조로 생을 관조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정처없이 떠돌고 떠돈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고, 삶에 대한 처연한 응시의 눈빛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