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주<br /><br />방송작가
▲ 김은주 방송작가

2000년대 초반, 대학원 수업 중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대구에서 방송작가로 일하던 지인이 방송국 내에서 작가 노조를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때만 해도 프리랜서인 방송작가들이 노조를 만드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도 쉬운 일은 아니다. 여성의 비중이 높은 방송작가들의 노조 조직은 최초이었고, 여성학과 대학원 수업에서 여성화된 직종이 가지는 저임금 등의 문제와 함께 방송작가 노조의 의미에 대해서 한동안 수업 중에 함께 이야기하고, 토론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필자의 지인은 방송작가 노조를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해고가 되고 말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가 되었다면 메인 뉴스도 될 정도의 아이템이고 기삿거리지만 방송국 내에서 벌어진 작가들의 대량 해고 사태는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노조를 조직하다 작가들이 해고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후엔 시도조차 어려웠을 것이고, 작가들에겐 노조는 그저 남의 이야기, 방송 아이템으로만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영남지역 작가들의 대량 해고 사태는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필자의 지인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가 되고 그 다음해인 2005년 필자는 신문사 기자에서 방송작가로 전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로 특수고용직의 형태다. 작가들이 몇 번이나 퇴직금 소송을 했지만,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는 뉴스를 종종 보면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다는 점에서 자포자기했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순전히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일을 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아니고,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방송작가의 노동자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지는 어디에 문의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전국 각지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방송작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언론노조 산하에 방송작가지부가 출범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전국에 1만 명의 작가를 대표하는 노조를 출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다시 실패하고 좌절할 것이라는 게 너무나 명백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일을 우리가 해냈다.

그동안 방송에서는 비정규직의 문제나 우리 사회 노동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야기했다. 뉴스로 만들고 다큐로 제작하고, 시사 정보 프로그램의 아이템으로 다뤄왔다. 그 많은 일을 방송작가들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작가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선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작 방송작가인 우리 역시나 우리 문제에 대해선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낮은 목소리지만, 노조 출범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다.

노조 출범 이후에 전국 단위로 흩어져 있는 작가들을 조직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역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사업장 마다 이해 관계가 달랐다. 좀 더 촘촘한 조직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난 24일에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산하에 전국 최초로 영남지회가 출범을 했다. 이번 영남지회 출범식에는 대구 지역 방송국의 전폭적인 후원과 지지로 이루어졌다. 2000년대 초반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작가가 해고되었던 것에 비하면 노조 출범에 지역 방송국의 지지를 받는다는 게 감회가 새로웠다.

필자는 영남지회 출범식을 지켜보면서 십 여년 전 대학원 수업에서 작가 노조를 이야기 했던 언니의 목소리와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당신들의 노력이 오늘 우리에게 마중물이 되어 돌아왔다는 생각에 마음 한 켠이 뭉클했다. 그리고 늦었지만 지면을 빌어 고마운 인사를 대신한다. “선배님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