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주 한동대 교수
▲ 김학주 한동대 교수

인터넷 댓글을 볼 때 우리나라의 계층간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 직감할 수 있다. 노인 부자들은 보수다. 반면 살기 어려워진 젊은이들은 빠른 변화를 추구한다. 이제 영호남의 갈등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다. 사실 세계적으로도 이런 모습이다. 진보는 정의롭고, 타협이 없어 좋다. 그 생각이 성경적이라 또 좋다. 그러나 순진해서 싫다. 추구하는 방법이 현실적이지 못해 더 싫다.

예전에 한 TV토론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재벌을 성토하는 자리였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진보진영의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나도 재벌의 역기능을 지적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재벌처럼 악마가 되어 있었다. 진보의 판단기준은 너무 고결하여 천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을 벗겨 놓으면 나보다 깨끗할까?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죄스러움을 알기 때문에 신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살아간다. 자신이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인간이 그럴 수 없다`는 진리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남을 정죄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하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정죄할 수 것은 영혼을 설계하고 사랑하신 신의 고유권한이다.

아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다만 한국의 노인부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독일식 통일이다. 서독은 동독의 화폐를 1대1로 통합했다. 즉 서독이 동독의 자산을 너무 비싸게 사 준 것이다. 그 후 서독은 고생했다. 북한 동포들이 이념에 사로 잡혀 있을 때 한국인들은 땀을 흘려 조국을 재건했다. 그런 수고를 통해 모은 돈을 통일비용으로 지불하기 싫을 수 있다. 물론 통일은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경제적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특히 인구구조가 급격히 노령화되고 있는 한국 경제는 성실하고 근면한 북한 노동력을 수혈받아 생산성을 높이고, 성장동력을 마련할 수 있다. 그래서 젊은 진보는 통일을 외친다. 반면 기득권 노인부자들은 통일비용이 얼마나 상승할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싫을 수 있다.

통일이 분명 소망스러운 것이지만 노인들의 우려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현 정권이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진보에 가깝지만 통일의 당위성을 앞세우기보다는 통일비용을 낮출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의식주 관련 필수소비재의 경우 북한은 시장을 제공하고, 남한은 기술을 대고, 그 생산시설은 제3국인 중국에 경제특구를 만들어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자본은 해당 기업의 주식을 홍콩에 상장시켜 조달하면 된다. 성장 잠재력이 풍부한 북한 소비시장에 투자하고 싶은 외국인들은 많을 것이다. 그런 것부터 통일을 준비하자. 준비 없는 의사결정은 많은 실패비용을 수반한다. 만일 북한이 이런 제의를 거절하면 그들에게 통일의 소원은 없는 것이다.

눈을 국내로 돌려보자. 청년실업률이 10%에 육박하고 있고, 직업의 질을 따지면 그 수치는 훨씬 높을 것이다. 최근 정부는 `일자리 안정기금`이란 카드를 꺼내 들었다. 기업이 고용을 늘리면 그 인건비의 일부를 정부가 보조하겠다는 내용이다. 질문은 “계속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이는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기업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의 최적 수준을 알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직업 분담은 팀워크를 깨기 십상이다. 기업은 경쟁력을 잃기 시작할 때 빨리 사업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도 큰 지혜다. 정부의 할 일은 새롭고 혁신적인 창업이 쉽고 지속적으로 잉태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다.

정부가 포퓰리즘에 갇혀 졸속행정으로 인한 실패비용이 늘어나면 누가 세금을 내고 싶어할까? 또한 진보 정권이 들어선지 1년이 지난 지금 극빈층의 삶은 개선되었는가? 진보의 색깔이 성과로 드러날 때 노인부자들도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