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설 연휴 봄기운 따사로웠지만…

▲ 설날인 16일 오전 지진 피해 이재민 대피소인 포항 흥해체육관 앞 `만남의 광장`에서 치러진 합동차례에서 이재민들이 차례를 모시고 있다. /이용선기자

`설 아닌 설`이었지만 인정은 여전했다.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모여 서로 정담을 나누는 민족최대의 명절인 설 연휴가 지진 이재민들에겐 평소보다 더 우울했다. 수차례 여진마저 이어지면서 차마 명절을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공무원들도 설 연휴를 반납하고 지진 대피소에서 이재민을 돌봐야 했다. 자원봉사들 역시 이재민들의 식사와 청소봉사로 즐거운 설날을 잊었다.

지진 이재민들은 객지에 생활하고 있는 가족과 친지들의 고향 방문도 만류한 채 대피소에서 쓸쓸한 연휴를 보냈다. 차례상은 아예 엄두도 못낸 것은 그렇다 쳐도 `4.6여진`에 이어 설 연휴 기간 4차례의 여진이 숨가쁘게 이어지면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진의 공포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지난 11일의 `4.6여진`이후 흥해실내체육관 등에는 51세대 109명이 추가로 이재민 생활에 합류했다. 흥해 실내체육관에 60개의 텐트가 추가로 설치됐다. 일부는 모텔에 임시 보금자리를 틀었다. 재산피해 신고도 자고 나면 늘어나고 있다. 이날 현재 주택 1천536건을 비롯 상가 공장 등 모두 1천648건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설날 조상 모시기를 건너뛸 수는 없었다. 설날인 지난 16일 오전 11시 포항 흥해실내체육관 앞 임시 천막에 합동 차례상이 차려졌다. 설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지 못한 이재민들이 합동으로 차례를 지냈다. 제수음식과 합동차례상 차리기는 포항시와 흥해향토청년회가 맡았다. 이재민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지내기 시작했다. 이어 이강덕 포항시장과 박명재·김정재 국회의원, 문명호 시의회 의장 및 시의원 등 지역 주요 기관단체장들이 차례상에 잔을 올렸다. 차례를 지낸 뒤 적십자봉사단이 끓인 떡국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덕담을 건넸다.

하지만 차례를 지내는 이재민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조은호(77·한미장관맨션 거주)씨는 지진의 두려움과 고향을 찾지 못한 죄스러움으로 인한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울컥 눈물이 쏟아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조씨는 고향이 경남 밀양이다. 집안의 장손으로서 차례를 주관해야 하지만, 대피소 생활을 하느라 고향을 찾지 못했다. 조씨는 “장손으로 설 차례를 올리지 못해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며 “그나마 포항시에서 합동차례상을 차려줘 고맙기는 하지만 여전히 손수 차례를 준비하지 못해 마음이 편치않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대피소 생활을 하고 있는 김모씨(68)는 “설 준비도 못했지만 외지 가족들에게 지진으로 불안하니 설 쇠러 오지 말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재민 뿐만 아니라 공무원들 역시 설 연휴에도 쉬지 못해 파김치 신세로 이재민 뒷바라지를 했다. 포항시와 포항시설공단 직원들이 매일 3교대로 근무했다.

공무원인 김모(53)씨는 집이 대구이다. 부인과 자녀들만 차례를 지내러 가고 김씨는 혼자 남아 지진 대피소 운영을 지원했다. 그는 “공무원으로서 당연히 해야될 일을 하고 있다”며 “매일 휴일도 없이 이어지는 업무가 고되기도 하지만 집을 잃고 지진 불안속에 생활하고 있는 이재민들만 하겠느냐”고 말했다. 김씨는 “요즘 이재민들과 공무원들 사이에 오해의 폭이 커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하루 빨리 지진 복구가 이뤄져 이재민들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기만 바랄 뿐”이라고 말을 맺었다.

설 연휴에 쉬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있다. 대한적십자사 자원봉사단. 설 연휴 이재민들을 위한 식사 봉사에 나선 따뜻한 마음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떠나 체육관 주변이 휑한 분위기인데도 이들은 설 명절에도 하루 20명씩 교대로 자원봉사활동을 이어가 이재민들도 미안해할 정도다. 90일 넘게 자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는 장덕이(53·여) 대한적십자사 포항지구협의회 사무국장은 본인을 `봉사중증환자`라고 소개했다. 장씨는 “설날 새벽에 일찍 차례를 지내고 이재민들을 도우러 현장에 재차 나왔다”면서 “힘들지만 적십자 회원으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자부심으로 봉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포항에 설을 쇠러온 아들 양재현(30)씨도 어머니와 함께 봉사에 동참해 눈길을 끌었다. 장씨는 “아들에게 봉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포항의 설은 그렇게 지나갔다.

/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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