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일본 ⑤

▲ 어린 아이의 키만큼 쌓인 눈. 홋카이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광이다.

뿔 달린 고양이만큼이나 보기 힘든 게 `엄마에게 다정다감한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찍부터 시작한 객지살이.

엄마는 1년 중 하루도 아들을 떠올리지 않는 날이 없었겠지만, 아들은 1년 내내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보여주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식구에 대한 애정`이라고 믿었다.

기자는 살가운 아들 혹은,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겉으로 표현하는 남자와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다. 그래서다. 48년 가까이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엄마에게 애정 표현을 한 기억이 없다. 서글프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10년 전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엄마는 부쩍 외로워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힘내고 건강 챙기시라”는 따뜻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기가 쑥스러웠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게 2~3년에 한 번쯤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삿포로와 도야 호수, 오타루 운하와 노보리베츠 온천을 찾아 떠난 일본 홋카이도 여행은 엄마와 기자가 함께 한 네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 눈 내린 거리를 오가는 삿포로 시민들.
▲ 눈 내린 거리를 오가는 삿포로 시민들.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벗어나 엄마와 함께…

태국의 푸켓, 필리핀의 보라카이, 중국의 청도를 향했던 이전 여행들은 자랑할 게 별로 없는 엄마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가 됐다.

여행 일정을 알려줄 때부터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엄마의 웃는 얼굴을 내내 볼 수 있다는 건 효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아들의 즐거움이었다.

`홀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이 기자의 방랑일지에 처음 새겨진 건 불과 9년 전. 그즈음 가슴을 치며 읽었던 시 한 편이 있다. 초식동물의 예민한 영혼을 가진 채 육식동물이 지배하는 세상을 겨우겨우 견디다 29살 젊은 나이에 사라진 요절 시인 기형도(1960~1989)의 `엄마 걱정`. 이런 노래다.

열무 삼십 단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홋카이도에도 노점이 적지 않다. 한국처럼 고구마, 옥수수, 오징어 등을 구워 판다.
▲ 홋카이도에도 노점이 적지 않다. 한국처럼 고구마, 옥수수, 오징어 등을 구워 판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시장 간 엄마의 귀가를 애타게 기다리던 어린 아들은 자라서 `엄마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된다. 그게 세상 이치다.

그렇다면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는` 시간은 누구에게 더 길까? 이는 답이 너무나 빤한 질문이다. 아들이 엄마를 기다리던 시간은 엄마가 삶 내내 아들을 기다리는 시간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 수준일 터. 시인 기형도의 엄마나 기자의 엄마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 자명한 사실이 시를 읽는 세상 모든 아들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이쯤 되면 기자의 여행 패턴에 `가끔은 엄마와 같이 떠난다`는 문장을 추가시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을 기다리게 하는 아들이 눈앞에 함께 있기에 기다릴 필요가 없는 시간은 세상의 엄마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그게 짧은 여행의 단 며칠간일지라도.

▲ 홋카이도에도 노점이 적지 않다. 한국처럼 고구마, 옥수수, 오징어 등을 구워 판다.
▲ 홋카이도에도 노점이 적지 않다. 한국처럼 고구마, 옥수수, 오징어 등을 구워 판다.

▲구운 옥수수를 먹으며 눈 내리는 거리를

온천욕과 녹음 우거진 숲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홋카이도는 맞춤한 여행지였다.

도야 호수 주변을 산책하면서, 삿포로 시내를 목적 없이 돌아다니면서, 오타루 운하에서 배를 타면서, 심지어는 지옥 계곡의 지독한 유황 냄새 속에서도 엄마는 내내 웃었다. 웃음으로 생겨날 주름 걱정도 하지 않고. 아들과 마주 앉아 먹는 모든 음식이 다 맛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육류와 밀가루를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나이임에도 돼지 뼈로 육수를 내고 목살을 고명으로 올린 일본식 라면의 국물까지 남기지 않았고, 고추냉이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초밥집을 향하는 아들의 발걸음을 말리지 않았다.

홋카이도의 차가운 바다 속에서 맛있게 살을 찌운 대게를 먹으러 가서는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 몫의 게살을 아들 접시로 옮겨주느라 바빴고, 거리를 산책하다가 발견한 노점의 옥수수 구이를 사 들고는 열두 살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눈 내린 이국(異國)의 거리를 자식과 더불어 걸어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우리들의 엄마라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기자는 세상사를 잘 모르고 살아온 듯하다. 홋카이도 여행 둘째 날이었던가. 호숫가를 걷던 엄마는 다리가 아프다며 잠시 쉬어가자고 했다. 마침 근처에 긴 나무 의자가 있어 거기 앉았다. 뒤에서 바라본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작고 가냘퍼 보였다.

그 순간 기형도의 시가 다시 떠올랐고, 앞으로는 `엄마의 걱정`이 아닌 `엄마의 위로`가 되는 아들로 살고 싶어졌다. 지천명(知天命)이 가까워오니 이제 겨우 철이 들려는 걸까?

▲ 심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삿포로 라면집의 주방장.
▲ 심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삿포로 라면집의 주방장.

훗카이도를 여행한다면 이곳은 꼭!

아이들 키 높이만큼 쌓여있는 새하얀 눈, 맵고 차가운 바람이 불지만 한없이 깨끗한 공기, 여기에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주는 온천. 홋카이도는 겨울에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해마다 수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눈축제로 유명한 삿포로와 곳곳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 온천지대는 홋카이도의 자랑이다. 길고 오래 지속되는 겨울 추위를 여행자들이 좋아할만한 관광상품으로 개발한 홋카이도의 저력.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에 더해 생선과 돼지고기, 유제품과 채소를 재료로 만든 각종 요리는 홋카이도의 매력을 높이고 있다. 게다가 한국과 멀지 않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재미와 소소한 감동이 있는 여행지 홋카이도로 떠날 계획을 세운 사람들이라면 아래 추천하는 곳은 빼놓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 홋카이도의 `지옥 계곡`. 유황 냄새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온천지대다.
▲ 홋카이도의 `지옥 계곡`. 유황 냄새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온천지대다.

유황 냄새 진하게 풍겨오는 `지옥 계곡`

`지옥 계곡`은 홋카이도에서 손꼽히는 유명 온천마을 노보리베츠에 인접해 있다. 홋카이도를 찾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곳이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는 내내 계란이 썩으면서 내는 것 같은 유황 냄새가 풍겨왔다.

지옥 계곡이란 명칭은 땅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와 그 냄새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1만여 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분화구인데, 일대에선 분당 수천 리터의 온천수가 솟아난다.

그다지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나지만 지옥 계곡의 온천은 각종 피부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연중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 푸른 호수와 설산이 여행자를 유혹하는 홋카이도.
▲ 푸른 호수와 설산이 여행자를 유혹하는 홋카이도.

사파이어 색채로 빛나는 `도야 호수`

짙푸른 푸른빛으로 여행자를 반기는 `도야 호수`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홋카이도의 숨겨진 관광명소다.

삿포로에서 남서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야 호수는 백두산 천지와 같은 칼데라호(화산 폭발로 주위가 붕괴돼 생성된 호수)다.

주변은 눈이 쌓여 있지만 호수 자체는 어지간한 추위에는 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둘레가 43㎞에 이르고 가장 깊은 곳은 수심이 179m다. 날씨가 좋아서 물결이 잠잠한 날은 유람선이 운행된다. 배에 올라 바라보는 도야 호수의 경관은 세상 풍경에 무심한 사람들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 `오타루 운하`

홋카이도 서쪽에 자리한 `오타루 운하`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오래된 건물 사이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길은 한 편의 서정시를 떠올리게 한다. 계절에 상관없이 많은 여행자들이 상념에 잠긴 채 운하 주변을 산책한다.

오타루는 본래 홋카이도의 무역항이었다. 운하는 100여 년 전 몰려드는 선박들의 화물 하선작업을 위해 만들어졌다. `경제적 필요성`으로 건설된 것이 이제는 홋카이도를 상징하는 `문화상품`이 된 것이다. 오타루 운하 인근은 야경도 아름답다. 창고를 리모델링한 레스토랑에선 연인들이 낭만적인 저녁식사를 즐기기도 한다.

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구창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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