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규열<br /><br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1994년 여름, 미국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식축구 스타의 실패와 몰락을 목격하였다. 오제이 심슨은 한 때 모든 미국인들이 열광하였던 미식축구의 영웅이었는데, 이혼한 아내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것으로 의심되어 법정에 세워졌다. 살인 사건의 현장으로부터 자동차로 도주하였을 뿐 아니라 산더미같은 증거들이 확보되어, 미국인들은 거의 그가 살인자인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사건을 맡았던 검사들은 사뭇 자신있는 케이스를 맡은 것으로 알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긴 법정 공방 끝에 그는 형사재판에서 배심원단의 무죄평결을 받아내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석방되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무죄평결이 있기까지 16개월 동안 전 미국인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언론미디어를 통하여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미국인들은 지금까지 이 사건을 전형적인 유전무죄의 케이스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이 거의 1년에 달하는 법정공방 끝에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다. 물론, 아직 대법원의 최종심이 남아있어 단정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기는 이르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저 심슨 케이스와는 확연하게 다른 맥락이 있어 두 사건을 직접 비교하는 일도 그리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보통 사람들의 인식 가운데 `유전무죄`의 그림자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심슨의 경우, 그의 재력을 동원하여 고용하였던 최고의 변호인단이 이끌어 낸 무죄평결이 과연 보통 사람들에게도 가능했을까 싶은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우, 삼성의 배경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미 목격한 바 다른 사람들이 실형선고를 받았음에도 그가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일이 가능했을까 싶은 것이다. 세세한 법적 논리가 가능할 것이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이 판결을 바라보는 느낌에는 `유전무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유전무죄`의 상황이 발생하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씁쓸한 감상을 가지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어차피 자유경제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시스템에서 가진 이들이 그들의 재력을 십분 활용하여 무엇인가 본인에게 유리한 고지를 획득하는 일을 어떻게 잘못이라 탓할 수 있겠는가 싶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일이 불법이 아니었으며 정해진 법질서와 제도에 어긋남이 없었다면, 더욱이 이를 어떻게 비난할 것인가 싶은 것이다. 차라리 이런 경우, 시스템이 가진 오류의 가능성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그런 가운데에도 사회의 질서가 그래도 적절하게 운용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심슨은 석방되면서 자신의 결백함을 재차 힘주어 주장하더니만 이후 또 다른 범법행위로 지금껏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 부회장은 석방되면서 `그동안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의 언급이 그저 영혼없는 공적 메시지가 아니라 그의 진정을 담은 사적 고백이었기를 바라는 바이다. 실로 그가 지난 시간의 어려움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변화를 위한 다짐을 새로이 하여 기업의 경영에 진정한 개혁이 확인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아직 최종심이 남아있으므로, 법을 다루는 이들은 심리와 평결에 있어서도 법적인 논리에 충실할 뿐 아니라 참으로 공평(公平)하고 무사(無私)한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연속에 시달릴 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열하고 저급한 금전적 논리에 휘둘릴 것인가를 숙고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세워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워 질 것인지를 명심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유전과 무전에 상관없이 공평하고 정의롭게 운용될 때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좋은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더불어 겨루는 `공정한` 경쟁이 존중받고 이웃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늘어갈 때에 나라와 지역이 한 계단 더 올라설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