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어린이는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이 성인과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3세 이전의 경험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렇다고 3세 이전의 경험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는 단편적인 사건은 잊혀 지지만 그때의 감정은 무의식에 남기 때문이다. 학대받은 어린아이가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후유증을 앓는 이유가 이것이다. 어린아이는 사건을 잊는 대신 감정을 기억한다. 성인은 이와 반대로 사건을 기억하는 대신 감정을 망각한다. 큰 슬픔이나 분노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심히 괴로워하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남는 것은 감정의 흥분이 소거된 사건 그 자체에 대한 기억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1681~1763) 선생은 `성호전집, 습망재기`에서 망각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습망`은 남송의 유학자 사양좌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연평문답`에 따르면, 만년에 불교에 심취한 사양좌는 망각을 익힘으로써(習忘) 양생(養生)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하지만 유학자 정호의 생각은 달랐다. 양생을 위해서라면 괜찮지만 도를 배우는 데는 해가 된다는 것이다. 정호가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는 사양좌의 습망이 일체의 생각을 제거해야 한다는 불교의 교리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맹자의 말처럼 본디 유학은 망각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익은 `그릇에 일정한 용량이 있는 것처럼 마음에도 일정한 용량이 있다. 열 되 용량의 그릇으로 한없이 쌓인 곡식의 양을 헤아릴 수 있는 이유는 그릇을 가득 채웠다가 깨끗이 비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때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비우는 것이다. 깨끗이 비우지 않으면 그릇은 곧 가득 차서 헤아리는 기능을 상실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망각으로 번뇌를 극복함으로 전인의 경지에 이른다고 보았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는 잊고 오로지 현재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이익의 논리다. 다만 조건이 있다. 성품의 안정과 성실의 보존이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사람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난 사건에 대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기억이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을 가능케 한다. 사람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은 나머지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지도자의 우매함과 위정자들의 정쟁으로 나라를 침탈당하고 민족이 도륙당한 지난날의 어두운 역사요 눈만 뜨면 터지는 지금의 대형 참사이다.

국민의 의식구조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안전불감증은 사고를 야기하고 작은 사고를 대형재해로 키우는 원인이 된다. 2014년 세월호의 비극 이후 해양수산부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5년간 해양조난사고 발생 현황을 분석한 결과 해상조난사고가 예년보다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는 29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지난달 26일 밀양 세종병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39명이 사망하는 등 19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런 대형 참사에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국회도 한몫을 한다. 안전 법률을 제정하지 않거나 법안이 국회서 계류 중으로 낮잠 자는 동안 벌어진 일이다. 이는 물질을 앞세워 생명과 안전을 경시해 온 천민자본주의와 후진적 정치행태의 결과인 것이다. 안전의식을 체질화하고 체계화하여 우리 사회가 다시는 그런 어이없는 재앙을 겪지 않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훌륭한 안전관리시스템을 갖추고 있더라도 사람들이 이를 지나치게 믿고 긴장을 풀고 방심한다면 결국 사고가 나게 된다. 국민 모두가 이런 참사를 영원한 교훈으로 삼아 많은 부분을 함께 바꿔나가야 한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