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호<br /><br />서울취재본부장
▲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술자리에서 토론거리로 내놓아선 안 된다는 주제 몇 가지가 있다. 정치, 종교, 사랑이야기다. 종교는 개인적 범주에 들어가는 신념이자 신앙의 문제이니 다른 사람과의 토론에서 승부낼 건덕지가 없다. 사랑 이야기는 백인백색이고, 이성아닌 감성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얘기이니 입을 대봤자 터럭 만큼도 달라질 일이 없으니 역시 패스다. 그나마 서로 상대를 설득할 여지가 있다고 여겨지는 정치 얘기도 우리나라에서는 만만치 않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틀리다고 목청 높이는 상황이니 아무리 토론해봐야 말 싸움밖에 안된다. 그러니 스트레스 풀자고 시작한 술자리에서 언급하지 말자는 자포자기 선언일게다. 그렇다해도 다른 주제는 차치하고, 우리 사회를 이끌고 가는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어두운 감옥에 갇힌 무기수가 있었다. 절망의 나날이었지만 그는 한 줄기 빛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교도소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교도소 마당 구석에 채소밭을 일구게 해 주십시오.” 첫 해에는 양파와 같은 채소를 심고 다음 해에는 작은 묘목을 심고 장미 씨도 뿌렸다. 한 해 두 해 지날 때마다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정성스럽게 밭을 일구었다. 새싹이 돋고 꽃을 피우는 식물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바깥에서 했던 것처럼 매일 꾸준하게 운동을 했고, 다른 죄수들이 운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행동은 교도소의 열악한 환경까지 개선하게 만들었다. 교도소 내에서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고,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가석방으로 풀려나가자 많은 사람이 기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첫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다. 만델라는 타고난 희망주의자였다. 종신형을 선고받자 사형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는 정치범으로 독방에 갇혀 있을 때 어머니를 잃고,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가족들이 강제로 흑인 거주 지역으로 옮겨지고, 둘째 딸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감옥에 있은 지 14년째 되던 해, 그는 딸에게서 손녀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며칠 뒤 면회 온 딸에게 만델라는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그 쪽지에 적힌 손녀 이름을 보고 딸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손녀의 이름은 `희망(아즈위·Azwie)`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감옥에서도 희망의 꽃이 피었다. 만델라는 교도소 안에서도 장미를 키우듯 자신의 희망에 물을 주었다. 그 희망은 나중에 국민의 희망으로 자랐고 인류의 희망이 되었다. 설혹 삶이 감옥처럼 느껴질지라도 포기해선 안 된다. 희망의 싹이 트지 않거나 잎이 시들고 있다면 더 부지런히 물을 줘야한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자신의 작품에서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적었다.“여기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희망을 버리는 순간 이 세상은 지옥이 된다.

우리 정치가 지옥길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이제는 희망을 얘기했으면 좋겠다. 사드 문제 하나로 썰렁해진 미국·중국과의 관계가 힘겹고, 위안부 합의 파기로 불퉁해진 일본을 애써 달래야 하는 외교도 힘겨운 마당에 경제 여건 역시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그나마 끝없는 대결 국면이던 남북관계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대화 국면에 접어들었으니 잘 보듬어 핵 위협없는 한반도가 되길 소망한다. 이처럼 어려운 국내·외 상황에서 우리 정치가 정치보복 논란에 휩싸이고 있어 걱정스럽다. 전 정권의 치부가 드러났다면 적절한 처벌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치보복으로 흘러선 안 된다. 이유야 어떻든 국민의 눈에 정치보복으로 비쳐진다면 문재인 대통령 역시 다음 정권에서는 또 다른 적폐로서 청산대상에 오를 수 밖에 없다. 태공은 `남을 해치는 말은 도리어 자신을 해치게 되니, 피를 머금었다가 남에게 뿜으면 먼저 자신의 입부터 더러워진다`고 했다. 사람들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교훈을 너무 쉽게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