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조선은 고려의 대간(臺諫)제도를 계승하면서 대간의 위상을 훨씬 강화시켰다. 조선의 대간은 여론을 근거로 왕의 잘못이 있으면 목숨을 걸고 직언을 했다. 한 번 해서 듣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계속했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스스로 사직했다. 대간의 탄핵을 받은 정치 관료들은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 일단은 사직서를 내야 할 만큼 그 위력은 대단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삼공육공을 두어 여러 관청을 통솔하게는 했지만, 대간을 중요하게 여겨 거기에 많은 권한을 주었다. 그리하여 풍문(風聞: 직접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정보를 가지고 공격하는 것)과 피혐(避嫌: 공격받은 사람이 혐의를 피해 사표를 내는 것), 그리고 처치(處置: 공격한 언론기관이 아닌 다른 언론기관에서 사실을 조사하여 판결을 내리는 것) 등의 법규를 두어 오로지 의논으로 정치를 하도록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의 문물제도를 설계하고 정비한 장본인으로서 독특한 군주관과 신하관을 피력했다. 군주의 독단적인 정치를 반대하며 군주는 최종적인 결재권만을 가지고 정책결정의 주도권은 재상에게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군주의 독단을 견제하는 제동장치와 재상에 대한 탄핵장치가 필요했고 그 역할을 대간이 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또한 대간은 천하제일의 인물만이 될 수 있다고 단언했으며, 당대 최고의 학문적, 정치적 식견을 갖춘 사람이면서 강개한 성격의 소유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간이 군주를 가장 집중적으로 간쟁했던 것은 국왕이 자신의 직무를 게을리 했을 때다. 다음으로 인사문제를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았을 때이며, 언로(言路)가 막혔을 때, 경연(국정전반에 대한 토론)에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것이 간쟁의 주요 내용이었다. 대간을 군주의 이목지관(耳目之官)이라고 한 것은 대간을 통해 세상사를 알아야만 제대로 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간에게는 관리를 임용할 때 반드시 대간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국왕이 어떤 관리를 임명하고자 해도 대간이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으면 그 관리는 관직에 취임할 수 없었다.

조선조 고위 정치 관료로는 한명회가 성종치세기간에 무려 107회에 걸쳐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한명회는 세조집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고 예종과 성종에게 두 딸을 왕비로 들여 왕실과 혼인관계를 이중으로 맺음으로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자신의 호화별장인 압구정에 중국사신 정동이 온다고 성종에게 궁궐에서만 쓰는 장막을 쳐달라고 요청하는 사건으로 대간으로부터 탄핵되고 성종이 한명회를 파직하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한명회의 세도가 한풀 꺾인 탄핵사건이었다.

조선의 대간제도는 왕조의 흥망과 운명을 같이 했다. 제대로 운영될 때에는 태평성대를 구가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부터 점차 망국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갔다. 영조 이후 이조전랑의 인사권을 이조판서에게로 넘긴 후부터 대간의 언론권이 제약되면서 사실상 조선의 정치구도는 바뀌게 된다. 대신들 손으로 넘어간 인사권은 당연히 대신들을 신랄하게 탄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결국 대간의 유명무실화는 국가권력이 한 가문에 집중되는 세도정치를 낳았으며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이 망하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이 탄핵되어 법정에 서고 적폐청산이라는 간판 아래 전전 대통령까지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이러한 결과는 지난정권의 위정자들이 국민의 소리를 듣고, 국민과 함께 생각하는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듣기 싫은 소리엔 아예 귀를 막아 버리고 생각이 다르면 매도하며, 입맛에 맞는 패거리들의 합창소리만 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국민들로부터 견제 받지 않으려는 어떠한 권력도 적폐청산이라는 도마 위에 오르는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