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은 령

대형마트 진열대 위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완두콩 통조림

금빛 양철 뚜껑을 열어 젖히는 순간

오래된 햇빛과 바람과 빗방울들도

거세당한 얼굴들로 빠져 나오고

생의 절정인 그 순간만을 불하받은

푸른 알갱이들은 유효기간의 실체를 모르는 체

둥글고 깊은 진공 속에서 발아의 꿈을 꾸고 있다

이 도시의 중앙으로 진공의 통로가 열려 있다

그 길 따라 가면 발아점을 상실한 21세기가 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선택되어 포박 당한 우리들의

탱탱하게 부풀어진 욕망의 절정들

부패되지 않게 봉인되어 역사의 한 켠에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다

누군가를 위한 두엄조차 될 수 없는

대형마트와 통조림이라는 시어로 대표되는 근대적 메커니즘에 갇히고 얽매인 현대인들의 비극성을 고발한 시다. 발아를 꿈꾸는 푸른 알갱이 같은 인간의 희망은 결국 발아하지 못하고 양철 통 속에 갇혀 통제되고 상실되어, 끝내는 두엄도 되지 못하는 처지에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묶여버린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시인정신이 뚜렷한 작품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