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나라` 김광규 지음·문학과 지성사 펴냄시집·2만1천원

“언제나 안개가 짙은/안개의 나라에는/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어떤 일이 일어나도/안개 때문에/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안개 속에 사노라면/안개에 익숙해져/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보려고 하지 말고/들어야 한다/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귀는 자꾸 커진다/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토끼 같은 사람들이/안개의 나라에 산다” (`안개의 나라` 전문)

김광규 시인(77)이 40여 년 시 인생이 담긴 시선집 `안개의 나라`(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그는 1975년 등단한 이후 열 권이 넘는 시집을 출간했다. 4·19의 아픔을 노래한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아니다 그렇지 않다` 등의 시편으로 사랑받아 온 그이다. 그의 시는 한편 쉬운 언어와 평범한 생활 소재를 이용해 우리 삶의 일상성 영역을 개척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이러니 기법이 있다. 한 평론가는 “그의 시는 언뜻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읽을수록 마음속에 더 큰 여운을 남긴다”고 평한다. 삶과 현실의 구체적 체험을 평이하고 친숙한 언어로 형상화한 시들이 많은 독자의 공감과 사랑을 받아온 것이다.

이번 시선집은 군부의 검열로 배포가 금지됐다 이듬해에 출시됐던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에서 등단 40년을 맞은`오른손이 아픈 날`(2016)까지 총 11권의 시집, 800여 편의 작품 중 시인이 자선한 224편을 묶었다.

투명한 이미지와 명징한 서술로 현실 삶과 시대를 통찰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그의 시는 세속의 폭압적 질서에 저항하고 인간 삶의 모순과 허위를 어김없이 짚어내는 그 순간에도 차분하고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외형적 단순성과 내적 비의(秘義) 사이의 긴장을 형성하는 시인 특유의 아이러니 역시 그의 시를 오롯이 감상하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삶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내밀한 공감과 시 한 편을 맺기까지 수차례 고쳐 쓰는 과정에서 비롯했을 김광규 시의 매력은 국내외에서 크게 인정받아 녹원문학상, 김수영문학상, 편운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산문학상, 독일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 상과 한독협회의 이미륵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올해 희수를 맞은 시인은 변함없이 틈날 때마다 이면지에 연필로 몇 줄씩 `끼적거린다`. 40여 년 지속돼온 그의 오랜 버릇은 `오늘도 글을 쓴다`는 말의 정신과 자세의 실천이자, 현대 한국 시사에 의미 깊은 `일상시`의 지평을 여는 데 한몫했다.

오랜 세월 시인인 동시에 번역가, 문학 교수로 살아온 김광규는 한 산문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글쓰기의 간접적 지표가 됐다”고 밝히며, “독일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의 비의적 서정시에서 엄격한 언어의 형식을 배우고, 프란츠 카프카의 부조리한 소설에서 난해한 내용과는 달리 즉물적이고 정확한 문장을 사용한 데서 서술의 명징성을 배웠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김광규, `나의 시를 말한다`, 2001).

▲ 김광규 시인<br /><br />/문학과지성사 제공
▲ 김광규 시인 /문학과지성사 제공

외적 평이함과 내적 비의(秘義)가 빚어내는 긴장으로 가득한 김광규 시 세계의 연원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인에게는 세상의 메마름을 견뎌내게 하는 최소한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정말로 위대한 시란 바로 이 근거에 육박하는 물질의 유희이다. 이 믿음이 존재의 근저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고독을 이겨내게 하고 자기 존재의 심연을 열어 보이게 한다.

김광규는 한편으로 악이 군림하는 이 세계를 거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심오한 근거 위에 존재하는 이 세계를 포용한다. 그의 꾸밈없는 도덕주의는 무병 신음을 경계하면서도 상처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상처들을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을 믿는다. 그것은 꽃잎처럼 가녀린 손이고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이고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이다.” ―김인환(문학평론가), 해설 `지상의 거처`에서

/윤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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