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회가 버퍼링(Buffering·일시정지 현상)에 걸린 것 같다. 지금 사회를 정의할 수 있는 최적의 말은 과유불급 뿐이다. 언론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특정 인물 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우상화(偶像化) 작업을 방불케 한다. 그의 말은 곧 진리요 법이다. 그의 행동 하나 하나는 무조건 찬양의 대상이다. 작년 5월 이후부터 언론은 식당, 영화관, 산 등 장면만 다를 뿐 마치 정지된 모습을 반복해서 내보내는 것 같다. 그 정지된 화면 안에는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웃고 있는 한 사람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청문회다, 뭐다 요란 떨면서 각료가 된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대한민국은 지금 말 잘 듣는 신하들과 언론을 배경에 둔 한 사람에게 올인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생방송 뉴스를 보면 뉴스도 버퍼링에 걸린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그것은 필자의 착각이 아니라 이 나라의 현실이다.

적폐에 의존한 한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서 발생한 버퍼링은 정말 집요하다.

안보교육을 우편향 적폐라고 하면 이 나라의 안보교육은 좌편향으로 가야 하는가? 이념의 시소가 무너진 지 오래인 이 나라에서 좌우 균형잡힌 이념교육을 말하는 이상주의자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념에 있어서만큼은 균형은 없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념은 맞고 틀림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싫고 좋음의 대상이다. 정권이 좋아하면 맞는 것이고, 정권이 싫어하면 틀린 것이다. 지금 돌아가는 나라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블랙리스트가 사건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블랙리스트라는 말을 만든 사람들이 지금은 대놓고 블랙리스트 사건을 저지르고 있다. 엄연히 임기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쫓아내는 것, 그 자체가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고 뭔가. 사람들은 말한다. “새로운 정부와 그 정부에 속한 검찰들이 지금까지 한 것은 신(新)블랙리스트를 넘어, 살생부를 만들고 그것을 집행한 것 외에 과연 한 일이 무엇인가?”라고.

버퍼링 걸린 사회에서 유일하게 진행 중인 것은 한 사람에 대한 신화 만들기다. 그 신화의 내용은 그의 손길만 닿으면 죽은 경제도 다시 살아나고, 모두가 같이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내용은 없지만 지금 형세대로라면 어쩌면 그것도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에 대한 언론 속 패널리스트들의 말과 글은 조선 초기의 아부 문학인 악장(樂章)을 연상케 한다. 그 내용은 조선시대 보다 아유(阿諛)가 더 심하다.

필자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펜을 들고, 그리고 써라!”라는 마틴 루터의 명언을 컴퓨터 시작 화면에 띄어 놓고 명상하듯 읽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필자의 글이 세상을 바꿀 만큼의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은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한다`라는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필자는 루터의 명언을 지워 버렸다. 왜냐하면 글의 대홍수 시대여서 그런지 글은 넘쳐나는데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무술년을 맞아 글쟁이들은 하나같이 희망가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희망가`가 아니라 출세를 위한 `충성가`(忠誠歌)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특히 정치는 더 그렇다. 지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왜 필자는 4년 후의 이 나라 모습이 떠오를까. 지금 이대로 간다면 4년 후에는 분명 좌편향 적폐청산 살생부가 만들어질 것이고, 이 사회는 더 큰 혼돈에 빠질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복수혈전은 멈춰져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용서와 화해에 바탕을 둔 상생의 길을 가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