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개화<br /><br />단국대 교수
▲ 배개화 단국대 교수

얼마 전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노멀 크러시` 라는 단어를 보게 됐다. 기사를 읽다보니 `normal crush`라는 영어 단어가 나온다. 이 단어의 뜻은 “평범한 것에 대한 열정”쯤 되겠다. 이 현상을 다룬 한 신문 기사는 20·30 세대가 성공보다는 평범하지만 자기가 만족하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면서 문득 작년 연말에 대학교 서클 선배들을 만나서 나눈 대화들이 생각이 났다. 그 때 필자는 필자의 세대만 해도 성공한 삶이나 그 성공한 삶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20·30세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한 선배는 자기 아들이 축구해설가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원래는 축구 선수가 꿈이지만 축구선수가 될 만한 재능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축구해설가가 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축구 기자가 된 다음에 해설가로 전직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선배는 아이에게 이왕이면 영국에 가서 FIFA(피파)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라고 말했다고 한다. 꿈을 크게 가져야 작은 꿈-신문기자-이라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필자는 그렇게 너무 큰 목표를 갖게 되면, 성취하지 못했을 때 실망감이 크지 않냐? 비록 평범하더라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교육하는 것이 더 좋지 않으냐? 고 반문했다. 너가 무엇이 되든 상관없이 너를 사랑한다고 늘 말해줘서 나중에 아이가 정말 뭐가 되든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게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자 다른 선배가 내 말을 반박한다. 어렸을 적에 여러 가지 꿈을 갖고 시도한 것이 모여서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성균관대 교수를 할 줄을 몰랐지만, 그런 시행착오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기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이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불행한 것은 어릴 때부터 이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큰 꿈을 꿔야 작은 꿈이라도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나름의 실용주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FIFA에서 일하는 꿈을 꾸었는데 한국의 어느 일간지에서 축구 기사를 쓰고 있다면,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할까?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 이것은 어려운 언론 고시를 패스한 성공한 삶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FIFA에서 일하지 않는 이상 무엇을 일해도 항상 마음에 불만과 불행감이 가득할 것이다.

이런 필자의 생각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면서 관찰한 것이다. 필자는 수업 과제로 낸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를 읽다가 소위 수능성적 상위 0.4%에 해당하는 필자 학교 의대나 치대 학생들이 의외로 자존감이 낮은 것에 놀란 적이 있다. 이 아이들은 서울대에 가지 못해서 속상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진짜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치·의대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필자는 우연히 자연대의 한 학생과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학생이 말하기를 약대에 가고 싶다고 한다. 학생 말로는 자기 과 선배 중에 실제로 약학대로 편입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우리 대학에 입학한 것은 약학대가 있기 때문이며, 같은 대학 학생에 대한 우대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학생은 수업 시간 중 웃음이 없고 항상 긴장해 있어 필자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학생들이 학업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면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이런 아이들이 꽤 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에게 한 번은 `작은 꿈이 쌓여 큰 것도 얻을 수 있어, 너무 큰 꿈부터 안 꿔도 돼` 라고 말해 준 적이 있다. 그 때 학생은 조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노멀 크러시`가 그다지 회자되지 않는 것을 보면 “작은 꿈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직 우리 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