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br /><br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중용(中庸)`의 본질은 `신중한 실행이나 실천`이다. 플라톤(Platon)은 `어디에서 그치는지를 알아 거기서 머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따라서 크기의 양적 측정이 아닌 모든 가치의 질적인 비교`를 중용이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마땅한 정도를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것은 악덕이며, 그 중간을 찾는 것을 참다운 덕`으로 간파했다. 불교의 중도(中道)도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바른정당과의 통합여부를 놓고 뜨거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일부의 자유한국당 복귀로 바른정당은 이미 반 토막이 난 상태다. 국민의당 통합파-반통합파의 국회의원들 숫자도 얼추 반반쯤 되는 것으로 분류된다. 전문가들은 벌써부터 신(新)4당 체제를 점치고 있다. 국민들의 관심은 이제 양극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이 별도의 `중도 빅 텐트`를 치고 정치세력을 확대해갈 것인가 여부에 쏠려 있다. 험악한 경쟁을 일삼는 청백전 정치, 흑백논리에 빠져 사생결단에 몰두하는 투쟁정치의 폐해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진정한 적폐(積幣)다. 지난 2016년 20대 총선결과에는 양당정치의 비효율성과 불합리에 대한 반성이 담겨있다. 하지만 국민의당 출범이 중도정치의 착근으로 가기에는 치명적인 두 가지의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하나는 신당 국민의당의 발목에 호남당의 족쇄가 덜컥 채워졌다는 사실이고, 다음은 보수정당 내의 중도정치 세력이 독립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전략적 미스가 됐건, 상황의 한계 때문이건 간에 안철수로서는 지난 총선에서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 천추의 한일 것이다. 그 동안 국민의당이 펼쳐온 정치는 안철수의 `새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진보`정치의 인력(引力)으로부터 잠시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호남에 기반을 둔 국민의당 내 탈당반대파들의 언행은 배경이 뻔하다. 그들은 적절한 기회에 더불어민주당으로 들어가던가, 이대로 남아 있는 것이 정치생명 유지에 유리하다는 계산이다. 통합이야말로 자신들의 정치적 전정(前程)을 망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몸을 던져 반대한다. 아마도 안철수는 지난해 19대 대통령선거 패배를 통해서 호남에 발목 잡힌 자신의 처지를 절절이 깨달았을 것이다. 승부수를 던져 `중도 실용주의`로 자신의 정치노선을 정돈할 필요성을 간절하게 깨우쳤을 것이다. `지지기반`이 필요했던 안철수와 `간판`이 필요했던 호남정치인들의 공생은 결코 뿌리를 깊게 내릴 수가 없는 정치공학이었다. 진보와 보수로 딱 갈라놓고,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잣대로 꼴불견만 연출하는 정치가 유효하던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한다. `중도정치`야말로 지역정당, 이념정당의 한계를 뛰어넘을 블루오션일 지 모른다. `개혁적 보수`나 `합리적 진보`로 통칭되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고, 극단주의 정치에 넌더리가 난 국민들은 차고 넘친다. 한국정치는 물건을 많이 싣기 위해 평형수를 빼낸 세월호처럼 늘 위태롭다. 작은 파도에도 좌우로 속절없이 흔들리는 대한민국호에는 무게중심을 든든히 잡아줄 평형수가 시급하다. 물론 사익을 위해 이리 붙었다가 저리 붙었다가 하는 박쥐같은 처신이 아니라 극우와 극좌의 만행을 언제든지 꾸짖고 그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는, 수족관의 상어 같은 올바른 `중도정치`가 돼야 한다.

깨어있는 중도층이 두터운 국가사회야말로 극우와 극좌의 풍랑을 잠재우는 평형수의 힘을 지닌 중심 잡힌 사회다. 플라톤의 말처럼 `어디에서 그치는지를 알아 거기서 머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미덕인 정치가 우리에겐 절박하다. 한국갤럽 17%, MBC 19%, 동아일보 14.2%…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통합정당의 또 다른 지지율이 명분과 가능성을 예지하고 있다. 중도(中道)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