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순희<br /><br /><br /><br />수필가
▲ 김순희 수필가

밤마다 그림 같은 달을 뱉어 낸다는 죽장 토월봉 아래 입암서원이 앉아있다.

말 그대로 서있는 바위인 입암으로 오는 길은 세 갈래이다. 안동에서 청송을 지나오는 북쪽 길, 포항 영천을 거쳐 오는 길은 남쪽이다. 죽장에서 동쪽으로 난 상옥 하옥으로 가는 길이 세 번째인데 이 길은 비포장이다가 이제는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 드나들기 편해졌다. 등짐장수들이 오랫동안 걷고 걸어서 낸 그 길에 기대어 조금 더 넓은 길을 냈다. 어딘가 의지할 데가 있다는 것은 아는 길을 가는 것과 같이 마음이 푸근해진다.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선바위가 우리를 반긴다. 서원의 문지기인양 늠름한 모습에 떠들던 일행의 발길이 다소곳해진다.

조선 중기 장광 여헌 선생께서 입암으로 오신 것은, 따르는 제자들의 권유를 받기도 했고 난리를 잠시 피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마을에 와 보고는 진심으로 이 마을을 사랑하셨다. 나라의 부름을 받아 떠나 있을 때도 몹시 그리워하다 마침내 당신이 돌아가 누울 자리로 여기를 택했다. 선현이 사신 곳이니 명예롭기도 하지만 돌아가신 곳이어서 더욱 뜻 깊은 곳이다.

서원 앞 들이 농부가 구름을 간다는 `경운야`이다. 구름 속에 가려진 산비탈에서 소를 모는 농부의 목소리가 구름을 뚫고 들려온다. 농부는 밭을 갈다가 흥에 겨워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마저 갈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서원 앞 들이 비에 젖었다. 물안개 자욱한 저 들에 여헌 선생은 무슨 씨를 뿌렸을까 궁금해졌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보는 이의 마음이 아름다움을 낳는 것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느낀다.

서원의 마당에 섰다. 가만히 지붕을 올려다보자니 대부분 새기와 인데 중간 몇 골의 기와에만 이끼가 얹혀 있다. 번와를 한 모양이다. 번와란 기와를 뒤집어 새로 간다는 뜻이다. 기와를 새로 잇는 작업을 할 때는 아무리 낡아도 전부 다 새것으로 갈 순 없다고 한다. 원기와를 십 분의 이 이상을 남겨야 보수라고 할 수 있다. 서까래든 기둥이든 전통건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보수를 할 때 이 원칙을 꼭 적용한다고 했다.

번와장이는 지붕 위에서 네 발로 기다시피 일을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서 장기를 두 듯 일을 한다면 기와 골의 이가 제대로 맞는지 금세 알 수 있지만 지붕 위에 엎드려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오르락내리락 하며 기와를 얹기엔 너무 번거로운 과정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솜씨 좋은 번와장이 우리나라에 흔치 않다고 한다.

번와에서 살아남은 몇 골의 기와를 보니 더 정이 갔다. 오래 써서 낡은 것이지만 먼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경험치를 인정받은 것 같다. 새로 자리를 옮겨 앉은 기와들이 혹여나 제자리 못 찾고 낯설어서 들뜨기라도 할까 봐 중간에 앉아 군기를 잡고 있어 든든하다.

이끼 긴 기와를 보니 어머님이 생각났다. 살림의 고수답게 서투른 나를 늘 일깨워 주셨다. 긴 투병 끝에 어머님을 여의고 얼마 전 49재를 지냈지만, 그제 증조부 제사를 지낼 때 삼색 나물을 삶는 내게 늘 무르게 데치라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간장독이 바닥을 보인다는 동서의 말에도 메주 만들어 달며 짚으로 매듭짓는 방법을 꼼꼼히 일러주던 말씀이 새록새록 새겨졌다. 어제는 지인이 건네는 쑥떡을 보면서도 어머님이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즐겨 찾던 음식인데 싶어 목이 메었다.

건물을 깁는 일보다 새 건물을 세우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번와 할 때도 모두 새 기와일 때 더 보기에 깔끔할 것이다. 하지만 원래 것은 그 자리에서 바람과 비를 견뎠고, 그 곳에 살다간 이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있다.

비에 젖은 마을의 둘레 길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다 문득 돌아보니, 새로 들어온 새기와가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이끼 낀 오랜 기와가 힘을 보태고 있는 입암서원의 지붕이 훤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