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선생님, 학생이 갑자기 소리가 조금씩 나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시험 감독 중이시던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전화를 하셨다. “네 선생님, 학생들 놀라지 않게 해 주세요. 금방 가겠습니다.” 서둘러 간 교실의 모습은 평온했다. 학생들은 아무 일이 없다는 듯 시험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 학생을 데리고 특별실로 왔다. 그리고 시험을 계속 보게 했다. 처음에는 틱이 조금 나오더니 금방 안정을 찾고 최선을 다해 시험을 보았다.

그 학생을 보면서 필자는 죄책감이 들었다. 학생이 푼 것은 단지 특정 교과의 시험문제가 아니었다. 학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대견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학생의 모습은 필자를 더 부끄럽게 했다. 필자에게는 “대안학교 학생들에 대한 정부 지원”이라는 필자가 꼭 풀어야할 문제가 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이 나라에는 조례가 참 많다. 모든 지방자치 단체에는 공통적으로 `학교밖청소년 지원 조례`가 있다. 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지원은 절실하며 꼭 필요하다. 그리고 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지원 못지않게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대안학교에 대한 지원이다. 왜냐하면 대안학교는 학교 밖 청소년이 되지 않기 위해 잠재적 학교 밖 청소년들이 최후의 보루(堡壘)로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례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경상북도 학교밖청소년 지원 조례, 제7조(교육지원) 2항 도지사는 `초·중등교육법` 제60조 3의 대안학교로의 진학을 지원할 수 있다.”

그런데 참 아픈 것은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 공교육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대안학교를 찾지만, 그 학생이 국가보훈대상자든, 사회배려대상자든 상관없이 이들 학생이 대안학교 학생이 되는 순간 정부는 이들 학생으로부터 등을 돌린다는 것이다. 조례에는 제60조 3의 대안학교로의 진학을 지원한다고는 나와 있지만, 대안학교는 정작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정말 웃기는 것은 이 학생들이 학교 밖 청소년이 되면, 그 때서야 교육부,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경찰청, 지자체 등 범정부 기관이 나서서 이들을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최근 전학과 입학에 대한 문의 전화가 많다. 전입학을 원하는 이유 중 상당수는 학교 부적응이다. 학부모님들은 하나가 같이 말씀하신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학교에 꼭 보내고 싶어요. 산자연중학교가 아니면 우리 아이는 학교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 소리는 간절함을 넘어 절규에 가깝다. 그 절규에 답을 해야 하는 필자는 늘 죄인이 된다. 왜냐하면 그 학부모님과 학생들이 받고 있는 정신적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또 그들에게 학비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러면 그들은 학비 부담 때문에 갈등을 하다가 결국엔 전입학을 포기하고 학교 밖 청소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모든 아이는 우리 아이입니다.”라는 말은 얼마 전까지 교육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있었던 교육부의 구호이다. 구호의 특징은 희망이 담겨있다는 것과 선동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되풀이해서 보거나 들으면 그렇게 믿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말이다. 필자를 포함한 대안학교 구성원들은 교육부의 구호가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단순히 바라는 데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대안학교 학생들이 겪고 있는 불합리함과 불공평함에 대해 정부와 국회, 교육부와 교육청, 인권위원회 등에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그 어떤 답도 들을 수 없다. 광화문 1번가에서도 그랬고, 온-교육에서도 그랬다. 청와대든, 교육부든, 교육청이든 그 누구도 대안학교에 대한 관심은 없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 높은 여론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대안학교에 있어서만큼은 분명 대통령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