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나를 흔들다` 이지형 지음·청어람미디어 펴냄인문학·1만4천원

“내가 더는 일류가 될 수 없다는 패배감도 완벽과 순수를 배척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애정에는 개인적인 패배감 이상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중천건(重天乾)` 해설 中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쯤 귀하디 귀한 책들을 본 적이 있다. 경기도 양평 소설가 김성동의 먼지 쌓인 집필실에서였다.

뭐라고 정확히 표현하기 힘든 오래된 책의 향기로 가득한 그곳에서 당나라 시대 만들어졌다고 하는 칠서(七書·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주요하게 취급한 일곱 권의 책)와 만났다. 묵은 표지에 날아갈 듯한 필체가 아득한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선명했다.

`주역` `서경` `시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다른 말로 사서삼경(四書三經)으로도 불리는 이 책들을 읽지 않고서는 벼슬길에 오를 수도, 선비라고 불릴 수도 없었다. 몇 백 년 전 이야기다.

우리가 고전(古典)이라 칭하는 이 책들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갈망하는 학자와 독자들에겐 고루한 것으로 취급되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이 많은 부분 퇴색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되짚어 제대로 살피지 않고서 우리가 어떤 새로움에 가 닿을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칠서`가 가진 현재성과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이 칠서 가운데 `역경`이라고도 불리는 `주역(周易)`은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점술서` 비슷하게 이해되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고전 해석의 새로움을 보여주는 `주역, 나를 흔들다`를 읽고 나면 이 해묵은 오해는 깨끗이 일소된다.

`주역, 나를 흔들다`를 쓴 이지형은 종합일간지와 경제지 문화부 기자 생활을 거쳐 현재는 인문과학 책을 주로 만드는 출판사 주간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병행하는 저술가다.

그는 이미 `강호인문학` `꼬마 달마의 마음 수업` `공간 해석의 지혜, 풍수` `사주 이야기` 등의 저서를 통해 “어려운 고전을 누구나 알기 쉽게 풀어 쓰는 작가”라는 독자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주역, 사주, 풍수로 세상과 사람을 읽어보려 했다”는 이지형의 말처럼 이 책 또한 단순한 `주역 풀이`를 넘어 `세상 속 인간 해설서`로 읽힌다는 것이 눈 밝은 사람들의 전언이다.

이지형은 책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이 바라보는 `주역`을 설명한다.

“주역은 2천500년 세월로 깊어진 신비로운 담론의 공간이다. 세속에 관한 관심을 놓지 않지만, 세속과는 절연된 심연이다. 주역을 들추는 순간, 우리는 다른 시간으로 이동한다. 주역은 64개의 괘로 세상사를 집약해 한눈에 조감하게 해준다. 주역은 느릿느릿, 이런저런 점사들을 던지다가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매혹의 메시지를 `툭` 하고 내던진다. 그런 차원에서 주역은 매혹인 동시에 혼돈이 아닐까.”

이제 `주역`의 64괘 가운데 첫째인 `중천건(重天乾)`을 해설하는 아래 대목을 보자.

“나이 들어가면서 조연에 대한 애정이 차츰 깊어진다. 행여 TV 앞에라도 앉아 있는 날이면 나는 드라마나 영화 속 조연들에 늘 주목한다. 그뿐인가, 그 이름도 야릇한 성인가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비주류의 밤무대 가수들을 지극히 바라보는 날도 있다.”

- 위의 책 29페이지.

한 사람의 일생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이야기되는 `건` 괘에서 주류가 아닌 마이너리티의 감수성을 발견해내는 이지형의 눈길은 깊고도 따뜻하다. 인간과 세계에 관한 그의 인식이 그러하기에 다시 이런 진술까지 가능하게 한다.

“내가 더는 일류가 될 수 없다는 패배감도 완벽과 순수를 배척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애정에는 개인적인 패배감 이상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 위의 책 29페이지.
 

▲ 주역과 사주, 풍수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해석하고 싶었다는 이지형 작가.
▲ 주역과 사주, 풍수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해석하고 싶었다는 이지형 작가.

`주역`의 첫 괘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그 해석을 만들어낸 태도를 보았으니, 이제 훌쩍 뛰어넘어 마지막 괘 `화수 미제(火水 未濟)`로 가보자. 이에 대해 저자 이지형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주역의 마지막은 진한 페이소스로 사람의 마음을 적신다. 주역의 첫 번째 `건`괘와 두 번째 `곤`괘에 `주역`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들 하지만, 주역의 64번째 괘 `화수 미제`야말로 주역의 본질을 드러낸다.”

`주역`은 강을 건너는 어린 여우의 꼬리가 물에 젖는 것으로 끝이 난다. 결국 미완(未完)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지형은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

“완결은 정체다. 미완만이, 흠결만이, 아쉬움만이, 회한만이, 아픔만이 사람을 역동적이게 한다. 갈등과 모순 없이 전진이 있던 적은 없다. 꼬리를 적신 여우만이, 그렇게 몸과 마음에 반성의 생채기를 안은 여우만이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 위의 책 242~243페이지.

한 권의 책을 소개하면서 그 안의 내용을 모두 말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건 영화의 스포일러(spoiler)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기자가 소개한 주역의 첫 번째와 마지막 `괘`에 관한 이지형의 해석 외 `주역`의 나머지 62괘에 관한 해석이 궁금한 사람들에겐 한 가지 방법만이 남았다. 바로 즐거운 마음으로 서점을 향해 가는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혹한의 추위를 피해 따스한 방에서 “`주역`이란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64개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작가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독특하고 흥미로운 해석과 만나는 건 분명 권장할 만한 연말 보내기 방법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 차원의 정보 하나를 다시 한 번 일러주고자 한다.

앞서 여러 차례 언급된 `괘(卦)`란 고대 중국에서 살았다고 전해지는 복희씨가 만들었다는 글자로 `주역`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홍성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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