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규열<br /><br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겨울이 빨리 찾아왔다고 한다. 기온도 예년보다 낮은가 하면 지역에 따라서는 눈도 벌써 많이 내린다고 한다. 매서운 한파가 닥치면 그제야 우리는 조금씩 어려운 이웃을 떠올리곤 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혹 겨울준비가 부실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고 돕는 마음도 일어나는 것이다. 춥지 않았을 적에는 그러면 그런 어려운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없었을까? 아니 늘 있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족함과 어려움을 이기며 지내는 이웃들이 우리 사회에는 언제나 있었을 터이다. 그러면, 평소에는 우리가 왜 그들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들의 삶이 혼자도 버티기 힘들 만큼 쉽지 않는 탓이 아닐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모두들 힘들고 버거운 판국에 어려운 이웃을 떠올리고 찾아 살피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무한경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개인과 사회의 발전과 유지를 위하여 물론 필요한 덕목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경쟁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성공에만 집착하게 할 때에 이 사회는 얼마나 냉정한 싸움터가 되고 말 것인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메시지로서 이제는 `함께 잘 살아가는 따뜻한 공동체`를 지향하여야 하지 않을까.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만 해도 치열한 입시경쟁 속에서 고3 교실은 우반과 열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받곤 하였다. 그 땐 그저 그러려니 했던 그 광경을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기형적인 부끄러운 모습이었는지. 전교 몇십 등 안에 들지 못하면 거의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교육을 교육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조금 더 잘 한다고 하여 옆자리의 친구를 돌아보지 않게 하는 교육이 정말 교육이라 불리울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한 학급에 앉아 있어도 끊임없이 동료를 밟고 이겨내는 기술만 가르치는 교육이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오늘 우리 교육의 모습은 혹 아직도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섬뜩해 지는 것이다.

핀란드의 교육이 자주 언급되곤 한다. 학생들에게 그 어떤 압박도 가하지 않는 것 같은데 학생들의 실력과 인성의 발달이 매우 바람직한 모델로 알려져 있다. 그들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표는 `한 사람도 놓고 가지 않는다`라는 지향점. 모든 학생들이 소기의 교육목표에 이를 때까지 함께 가도록 지켜본다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 간에 개성과 성향의 차이가 있어 지향하는 방향이 다를 수는 있지만, 그 차이를 될수록 조기에 구별하여 학생 모두가 적정 수준 이상의 `성공`에 이르도록 교육 시스템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즐겁고 행복한 학교환경을 만들어 낸 결과, 교육의 효과가 최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생 각자의 `사람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데, 그깟 시험 성적에 따라 취급을 받고 못받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그가 거둔 성적이 어떠하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내일의 발전을 기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교육은 바로 그런 과정을 격려하며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교회들은 마침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 성탄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인간이 쳐놓은 분열과 단절의 벽을 넘어 모두 `화합하고 사랑하거라`는 메시지가 바로 이런 계절에 나누어지지 않는가. 한 사람도 놓고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교육의 현장에 나누고 새롭게 다짐할 때에 우리 교육에도 참된 희망의 단초가 보이지 않을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모두가 입시경쟁에 내몰리는 사회적 폐습도 해소되기 시작할 것이며, 경쟁 일변도의 구시대적 학습 기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한 해 새로운 사회를 향한 정치적 토대가 놓였다면, 새 한 해에는 나라의 백년을 향한 교육적 토대가 새롭게 태동하기를 기대해 본다. 한 사람도 놓고 가지 않는 교육, 그래서 모두 행복한 사회가 지역과 나라에 찾아오기를 기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