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한 무리의 원숭이가 보름달 환한 밤에 귀로(歸路)를 서두르고 있다. 앞장서서 가던 대장 원숭이가 문득 우물에 빠진 달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가 무리를 멈춰 세우고 말한다. “이제 저 달이 우물에 빠졌으니 우리는 반드시 달을 건져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캄캄한 밤길로 다녀야 할 것이야” 원숭이들은 커다란 나무에 꼬리를 감고 손에 손을 맞잡은 채 우물 속으로 들어가 우물에 빠진 보름달을 건지려다 모두 물에 빠져 죽는다.

원숭이가 우물에 비친 달을 꺼내려고 두 손을 담그는 순간 달은 사라지고 만다. 원숭이가 퍼내려던 달은 달이 아니라 물에 비친 달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태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함몰되는 정경(情景)을 설파한 본보기다. 이것을 일컬어 `원후취월`이라 한다. 이것과 유사한 비유가 “달을 가리키니 달은 보지 아니하고, 손가락만 바라보네!” 하는 구절이다.

원후취월을 말한 사람의 의도는 사건의 본령(本領)과 무관한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叱咤)하는 것이다. `격화소양`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이런 일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적잖게 일어난다. 그것은 각자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과도한 욕망이나 기대치에서 발원한다. 아무리 명민한 자라 해도 눈이 흐려지면 본말전도(本末顚倒)가 쉬이 발생하는 법이다. 남들 눈에는 훤히 보이는데도 정작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벽암록`에 나오는 마조화상과 백장의 이야기를 보자. 어느 날 마조화상이 백장과 길을 가다가 들오리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백장에게 묻는다. “저것이 무엇이냐?”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갔느냐?” “저리로 갔습니다.” 이때 마조화상이 백장의 코를 힘껏 비튼다. 아픔을 참지 못한 백장이 비명소리를 내지른다. “가기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

불가(佛家)의 서책 가운데 어렵기로 호가 난 `벽암록`의 단편(斷片)이다. 인간의 눈이 추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들오리의 움직임을 보고 판단한 백장과 그것의 협애함을 일깨우는 마조화상의 가르침. 제한된 시공간을 살아가는 필멸(必滅)의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범주는 매우 협소하다. 우주적인 차원까지는 언감생심, 지구의 경계 안에서 살핀다 해도 들오리의 운동범위는 그다지 크지 않다. `가기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의 함의는 거기 있다. 흥미로운 점은 마조화상의 범상함을 간파한 남악회양의 일갈이다. “너(마조)의 가리고 따지는 마음과 취하고 버리는 태도로 인해 부처의 걸음이 뒤뚱거리고 있다!” 마조화상이 아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정진할 때 남악회양은 `즉심즉불(卽心卽佛)`을 갈파(喝破)한다. 크고 작음, 올바름과 그름, 있음과 없음, 밝음과 어둠을 기어이 분별하려는 인간의 누추한 분별심이 지극한 깨달음의 도를 어지럽히고 있음을 나무라는 남악회양.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자가 이것저것 묻다가 갑자기 첫째, 둘째, 셋째를 거명하면서 꼬치꼬치 따지고 누추하게 가르치려 든다. 그가 보기에 세상의 현자는 오롯 그 자신밖에 없다. 정의와 진리와 자율의 전령이자 수호자로서 그는 나 같은 비천한 중생은 안중(眼中)에도 없다. 오랜 시간 살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출중(出衆)한 한 사람의 지혜보다 어리석은 두 사람의 지혜가 크고 깊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해관계를 초탈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

2017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스스로를 돌아보다 홀연 `원후취월`을 떠올린 것은 분명 까닭이 있을 터. 그러하되 검열의 시대를 초래한 권부(權府)의 `블랙리스트`의 상흔(傷痕)이 여전한 까닭에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를 읽는 자들이 “제 눈 속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의 티끌”을 문제 삼는 희한한 세태가 조속(早速)히 사그라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