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규열<br /><br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종강을 앞둔 강의실에서 마지막 질문삼아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대개 답들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가지고 싶은 직업`으로 돌아온다. 언론인, 영화감독, 교수, 의사, 법관, CEO…. 하고 싶은 일이 먼저 있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가지는 것이 직업인데, 어떻게 우리 학생들은 장래 희망이 직업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이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직업을 여러 번 바꿀지도 모르는 상황을 기대하면서 `장래희망`도 그에 따라 또 여러 차례 바뀌어 갈 것인가. 혹 그게 아니라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을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보람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교육의 현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배움터에 모인 학생들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일정부분 기술을 가져야 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사람으로 공동체 구성원으로 또 세계시민으로 의미있는 삶을 영위하는 데에 그리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현대 사회에 이렇게 교육을 많이 받고 현명한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살아가면서도 온갖 사회적 문제들이 가득한 것을 보면, 우리의 교육이 그저 먹고살기에 충분할 정도의 `개인적 기술습득`에만 치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개인의 습득과 성공에 초점을 두느라 추격과 경쟁의식으로 가득한 배움이 이전의 교육모델이었다고 하면, 이제는 우리가 `공동체의식`을 배우고 가르쳐야 할 터이다.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더불어 행복한 질서를 세워가야 하는 것이다. 유네스코(UNESCO)가 정의하는 교육의 지향점을 보아도, 학생 개인이 알차게 배워 `사회가 조화롭게 발전하여 가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이끌어 내는 것이라 한다. 즉, 교육의 목표는 공동체의 조화와 성공이어야 하는 것이다.

배운다는 일의 또 하나의 요체는 `즐거움`이다. 무엇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 하지 않는가. 즐겁지 않으면 배울 수 없고, 즐겁게 배우지 못하면 제대로 익힐 수 없다. 배울수록 즐거워야 하고 그 즐거움이 동력이 되어 더 배우게 되는 것이다. 배우고자 하는 일이 나를 즐겁게 하지 않으면 이를 배우러 나서지 말 일이며,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은 학생이 배움터에 즐겁게 나아오도록 이끌어야 할 터이다. 호기심도 즐거워야 생길 것이며, 무언가 배운 다음 느끼는 성취감도 바로 즐거움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학교는 학생이 즐거운 곳이 되어야 하고, 선생은 즐기며 배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즐겁게 배우고 있는가. 우리는 즐겁게 가르치고 있는가. 학교가는 것이 즐거운 학생과 선생이 되어야 하고, 이를 바라보는 부모와 사회가 즐거워야 할 일이다.

배우면서 즐기는 일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나 가진 것으로 배우고 즐겨야 하는 것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이 나의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오늘 나의 이 모습으로 배우는 것이며 내일 내가 만들어 낼 것도 새로운 나 자신인 것이다. 나로 시작하여 내가 배운 끝에 보다 나다운 나를 탄생시키는 일이 바로 배우는 일인 것이다. 나다운 공부를 하기 위하여, 공부도 나 가진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내가 배워 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발견될 터이다. 의사가 되어, 작가가 되어, 교수가 되어, 음악가가 되어···. 그 어떤 직업을 가져도 그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일이 보일 터이다. 그러니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바꾸어야 할 일이 넘치는 세상에 내 욕심만 채워서는 될 일이 없다. 할 일 많은 우리 사회를, 새롭게 만드는 `배움`으로 채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