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방법을 아는 나무는 기존의 것을 훌훌 털어버린다. 털어버림에 있어서는 조금의 욕심이나 미련 따위는 없다. 남겨놓은 것이 없기에 아무리 혹독한 추위에도 나무는 의연(毅然)하다.

폭설을 이고 선 나무가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꺼이 빈 가지를 내어주는 자세 때문이다. 그 모습을 숫자로 나타내면 0이다. 0은 나무에게 넓고 깊은 둥근 나이테를 선물한다. 0의 의미를 아는 나무는 비록 설익은 이야기라도 부정하지 않고 나이테 안에서 수십 번 곱씹어 자신의 자양분으로 만든다.

남김없이 기존의 것을 훌훌 털어버린 나무는 인간들에게 비움으로써 채운다는 텅 빈 충만의 교훈을 수 백 년째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채워도 늘 허기진 인간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 인간들이 영원할 수 없는 이유는 지난 이야기를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이 절대선이라는 착각에 빠져 지난 시간을 송두리째 잘라 버리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인 태도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은 언제나 그 자리다.

얼마 전 MBC 라디오 아나운서가 뉴스 마지막 멘트에서 말했다. “적폐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는데, 여러분 정말 적폐 청산 때문에 피로하십니까?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아야 지금이 섭니다.” 필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비속어를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바르고 그름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얼마 전까지 필자는 즐겁게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방송사 사정으로 재방송을 보내드립니다”라고 말하며 바로 음악을 틀어 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새로운 사장이 선출되면서 마치 자신들이 이 세상을 바꾸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대는 방송인의 잡음 같은 멘트를 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과연 이 나라 구조상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이 존재할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고도 언론은 공영(公營)을 말할 수 있을까?

방송은 물론 검찰, 경제, 심지어 교육까지 이 나라 모든 요소들이 정치, 특히 정부에 너무 밀착되어 있다. 너무 가까우면 전체를 볼 수 없다. 적폐 청산 운운하는 사람들은 분명 시간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때가 되면 0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자세는 물론 부분과 전체를 볼 수 있는 거리감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나라의 모든 요소들은 거리감을 상실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성을 잃은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나라 정치 검찰, 정치 언론인, 정치 경제인, 그리고 정치 교육인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情)과 한(恨)이 많은 민족이어서 그런지 우리는 늘 거리 조절에 실패한다. 적폐, 고독사(孤獨死), 불신, 학교폭력 같은 말들은 거리감 상실에서 오는 말들이다. 그 피해는 상상 이상이다. 인간관계 거리에 대해 연구한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 간의 거리를 다음과 같이 네 유형으로 나누었다. “친밀한 거리(45.7cm미만), 개인적인 거리(45.7cm~1.2m), 사회적인 거리(2m~3.8m) 공적인 거리(3.8m이상)” 과연 우리는, 우리 사회는 어떤 거리에 놓여 있을까.

세상에 제일 어려운 측량 단위는 `적절함`이다. 적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나무의 0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사회 불신으로 기부가 줄었다는 연말, 최소한 학교만이라도 45cm의 의미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그 거리는 바로 나와 네가 아닌 우리의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