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대개 `힘들고 어렵다`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공부의 길은 무척 고단하다. 고등학생만이 아니라 부모들 욕심은 초등학생에서부터 오직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아이들이 싫건 좋건 애를 쓴다. 학생 자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관여해 그야말로 온 집안이 `힘듦`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총력을 기울여 좋은 대학을 들어가게 되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대학생들은 입학할 때부터, 더 나은 조건의 안정적인 직장을 잡기 위해 사투를 벌이듯 공부를 한다. 그렇게 공부를 하여 사회에 진출하고서도 그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직장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생존하기 위하여 또는 남보다 앞서기 위해 자격증을 따든지, 외국어를 더 공부하든지 등 공부의 쳇바퀴 속에서 자신의 여가 시간까지 쏟아야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공부광풍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원래 공부란 이렇게 힘든 것일까? 이 물음에 떠오르는 논어의 한 구절이 있다.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우리들은 이렇게 힘든 공부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데, 공자는 배우고 익히는 공부는 즐거움이라고 정리했다. 왜 공자의 공부는 즐거웠고 우리가 하는 공부는 이렇게 힘든 것일까. 공자는 15살에 공부에 일평생을 바칠 것을 마음으로 다짐했다.(十有五志于學) 그리고 15년이 지난 뒤 30세에 자신이 공부한 성과를 가리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적 관점, 즉 세계관을 확립하였다(三十而立)`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10년의 공부를 더한 결과 공자는 `세상사에 한 점 의심이 없는 경지에 도달했고(四十不惑)` 여기에서 10년의 적공(積功)을 더하고서는 마침내 `우주의 이치를 알 게 되는 경지(五十知天命)`를 성취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차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공자의 공부는 오늘날의 공부와 그 방향을 달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공부가 사물의 분석과 지식의 축적에 중심을 맞추고 있다면, 공자의 공부는 자신의 내면으로 그 중심이 쏠려 있다. 다시 말해 현대의 공부가 지식축적을 바탕으로 한 외적성취를 추구한다면 공자의 공부는 자아의 성찰을 통한 내적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에서는 전자를 위인지학이라 하며, 후자를 위기지학이라고 한다. 자아의 정신적 성취가 위기지학의 목표라면 앞서 공자가 공부한 학문의 방향은 위기지학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5세에 학문을 시작한 이래, 내면의 자아를 튼실하게 세워 마침내 50세에 세계가 운행되는 이치를 알게 되는 경지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공자의 위기지학은 60세에 이르러 자기 내면으로 회귀해 `타인의 칭찬과 비방에 초연한 경지, 즉 세상사의 시비를 초월한 경계인 `이순(耳順)`에 이르게 된다.

이 경지가 어찌 우주의 이치를 아는 것보다 더 우월하냐고 의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근세 한국불교의 위대한 선승이 물욕, 색욕, 수면욕 등 인간의 욕망과 오감을 자극하는 번뇌를 모두 극복했지만 끝내 남는 것이 명예욕이라고 술회한 것을 보면, 어쩌면 세상의 시비에 초연한 이순의 경지는 인간으로서 진정 도달하기 어려운 경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위기지학의 공부는 그가 70세에 도달해 `욕망과 이성의 불협화음이 없는 평화(不踰矩)`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의 공부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면, 공자의 공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수단으로서의 공부는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무한한 인간의 욕망이 종착역을 설정할 수 없기에 목적지 없이 길을 떠나는 여행자의 피로한 심신상태가 바로 위인지학으로서 공부를 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공부는 괴롭고 공자의 공부는 즐거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