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아빠 학교 가기 싫어! 시험 보러 학교 다니는 것 같아. 그런데 아빠는 왜 시험 문제를 내?” 초등학교 4학년 나경이의 말이다.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마치 꽃봉오리를 닮았다. 아이가 어떤 꽃을 피울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주말 아침이었다. 그런데 그 꽃봉오리 같은 아이가, 그것도 초등학교 4학년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시험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미어졌다. 저러다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필자의 마음을 알았는지 아이는 벌떡 일어나 이불을 박차고 옷을 주섬주섬 입더니 “나 자전거 타고 올게!”하며 늦가을의 찬란한 아침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학생들은 지금 시험과 전쟁 중이다. 지난주에는 큰 시험들이 몰려 있었다. 변별력을 확보한 수능이었다고 전문가들을 호들갑 떨게 만든 불수능이 있었고, 또 예비교사를 뽑는 임용 시험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는 학년말 시험을 위한 준비가 학교마다 한창이다. 대한민국 교사들한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왜, 또 누구를 위해 시험 문제를 내는가라고. 누군가가 필자에게 이것을 되묻는다면, 이론적인 내용이야 교육학개론서에 나오는 평가의 의미를 앵무새처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십년 이상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평가의 의미를 말하라면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론과 현실은 너무 다르니까.

입시공화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학교에서의 평가는 입시의 결정적인 자료밖에 되지 않는다. 선발을 위한 줄 세우기의 도구가 되어버린 시험! 시험 점수에 맞춰진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이 나라가 참 아프다. 그런데도 뻔뻔한 어른들, 특히 교사들은 말한다.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꿈이다.” 물론 0.01%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에 공감하는 학생들은 얼마나 될까. 또 어떤 교사들은 한 술 더 떠서 말한다. 시험을 부정하는 학생들은 패배자의 근성을 가진 자들이고, 그들은 자신의 노력은 생각하지도 않고 시험만 탓한다고, 시험에 대해 불평할 시간에 더 노력하라고.

많은 학생들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새도 없이 밤낮으로 학년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분명 밝아야 한다. 또 기성세대들은 지금의 학생보다 훨씬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런데 이 나라가 왜 이다지도 혼란스러울까. 미래는 차치하고라도 지금이 왜 이리 어둡기만 할까. 한치 앞도 내볼 수 없는 지금의 이 극심한 혼돈에 대해 공부 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

문제를 출제하다 말고 시험(試驗)에 대한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재능이나 실력 따위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검사하고 평가하는 일”,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하여 떠보는 일” 등 몇 가지 의미가 나와 있었다.

물론 학교 시험은 첫 번째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필자는 이 뜻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원론적인 질문을 필자 스스로에게 했다. `저마다 다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한 가지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것이 옳은가?` 그러다 알았다, 지금 학교에서 시행되는 시험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의미의 시험이라는 것을.

자연의 달력은 무소유의 달, 12월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차분히 새해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방향을 상실한 대한민국 교육 달력은 13월로 향하고 있다. 13월! 학생들은 빨리 학교 시험이 끝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방학 동안 학원 특강을 들어야 하니까. 자전거를 타고 온 초등학교 4학년 나경이가 책상에 앉으면서 문제집을 펴든다. 그 뒷모습이 너무 아프게 보였다. 우리는 언제 학생들에게 13월이 아닌 희망적인 새해를 제시해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