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얼마 전에 첫 시집을 냈다. 처음 낳은 자식과 마찬가지다. 내 눈엔 예뻐 죽겠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시는 음식점에서 뛰어다니다 그릇을 깨뜨리지도, 마트에서 울며 떼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문장이 지루하거나 동어반복하거나 알맹이 없이 난해하기만 하면 손가락질 받는다. 독창적인 개성과 미적 감각이 없는 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이나 공감이 없는 시는 예쁨 받기 힘들다.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요즘 나의 최대 관심사다. 여러 시인과 평론가들에게 시집을 보내 반응과 평가를 기다린다. 어떤 피드백이라도 감사하지만 이왕이면 좋은 말을 듣고 싶다. 그러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 시집을 읽은 독자가 인터넷에 독후감을 올리진 않았을까, 매일 내 이름과 시집 제목을 검색해본다. 시가 자식이라면 팔불출의 자식사랑이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강박이 되어 나를 구속한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다 타인의 평가가 더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정작 내 생각과 말을 표현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시집 북콘서트에서 나는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적당히 아름답고 또 적당히 위트 있는 말들로 시를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시`로 여겨질 것 같아 그랬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꽤 듣는 편이긴 한데, 그다지 좋은 사람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대체로 친절하고 대체로 선하며 대체로 깍듯하다. 타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욕먹기 싫어서, 누군가 나를 불호하거나 적대하는 것은 신경 쓰이는 일이라서 모두에게 적당한 미소와 예의로 대한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 안에 스스로를 가둬 불편할 때가 많다.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가 망가질까봐 짜증도 못 내고 싫은 소리도 못한다. `양심 냉장고` 덕분에 양심의 대명사가 된 방송인 이경규가 “불편해 죽겠다”고 호소했던 게 남의 일만 아니다.

남들이 나를 좋게 봐주었으면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강박은 유별나다. `동네 창피하게`, `남부끄럽게`, `남우세스럽게`라는 말은 거의 신앙과 다름없다. `옆집 반응`과 `동네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이제는 `해외 반응`에 집착한다. 김연아가 우승하고, 손흥민이 골을 넣고, 방탄소년단이 공연을 할 때마다 실시간 검색어에는 `해외 반응`이 반드시 오른다. `치맥 해외 반응`, `삼겹살 해외 반응`, `김치 해외 반응`까지 살핀다. 내 것이 혹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하는 불안증, 나보다 뭔가 더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야만 내 것이 봐줄만해지는 낮은 자존감 때문이다.

`해외 반응`의 역사는 유구하다. 원나라가 어떻게 생각할까, 명나라가 뭐라고 할까, 청나라가 과연 곱게 봐줄까 전전긍긍하며 할 말 제대로 못하던 긴 세월을 지나 일본 눈치 보고, 미국 심기를 살피며 살았던 선조들의 눈칫밥이 유전형질이 되었는지 무슨 일만 생기면 해외 반응부터 확인한다. 외부의 시선을 통해 나를 객관적으로 알려는 시도는 좋으나 외부의 평가가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내 수준을 알기 위해 문학 공모전에 거푸 도전했던 습작기, 시는 갈수록 `나`를 잃어버리고 심사자의 기호에만 맞추려는 기성품이 되어 갔다. 해외 반응을 신경 쓰면 쓸수록 우리 것을 잃어버린다. `세계화`를 외치며 얼마나 이상한 짓을 많이 했나. 애니메이션 `김치워리어`나 `강남스타일` 손목 동상 같은 흉물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새해엔 SNS도 덜 하고, 부풀려진 인간관계 부피도 줄여야겠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기보다 정말 소중한 이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들의 나`보다 `나의 나`를 더 사랑하려 한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아. 그저 존재할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