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난로의 불빛은 아늑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효율은 무척 떨어진다. 경제학은 효율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부자거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가난하다면 효율은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에도 저런 벽난로가 있다. 이 긴 인생을 살아가려면 활활 타오르는 지성 몇 개쯤은 간직해 두어야 한다.
▲ 벽난로의 불빛은 아늑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효율은 무척 떨어진다. 경제학은 효율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부자거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가난하다면 효율은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에도 저런 벽난로가 있다. 이 긴 인생을 살아가려면 활활 타오르는 지성 몇 개쯤은 간직해 두어야 한다.

△장면 하나, 맹자와 양혜왕

`맹자집주`라는 이 엄청난 고전의 제일 첫 장은 양혜왕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맹자를 본 양혜왕은 반갑다는 말 대신 “노인께서 천 리를 멀게 여기지 않고 찾아 오셨으니 역시 장차 우리나라에 이익을 주시려는 것입니까?”라고 말한다.

`이익`이라는 말 대신 `도움`이라고 했으면 괜찮았을까.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던 것일까. 맹자는 다짜고짜 말꼬투리를 잡는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왜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왕이 어떻게 하면 왕실이 이로울까를 생각하면 호족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 지역이 이로울까를 생각하고 호족이 이런 생각을 할 때, 호족의 가신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가문이 이로울까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가신은 호족을 죽여 그 재산을 넘보려하고 호족은 왕족을 죽여 그 재산을 넘보게 된다고 맹자는 말한다.

맹자는 양혜왕에게 `이익`이 아니라 `인(仁)`과 `의(義)`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면, `의`는 그러한 관계를 평가하는 집단의 가치관에 해당한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어른과 아이의 관계 등등. 이러한 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계 지음 속에서 형성되는 가장 기본적인 옳고 그름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관계의 중심에 `이익`을 가져올 때 서로가 서로를 탐하게 된다. 이것이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불렀던 모습일 것이고, 이런 모습은 현재의 자본주의와 거의 일치한다.

△장면 둘, `타짜`

고니는 곽철용에게 복수하고야 만다. 곽철용의 장례식에 등장한 아귀는 검은 양복에 흰 셔츠의 단추를 두 개나 풀어헤치고 등장한다. 장례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이 터무니없는 애도자는 (곽용철의 오른팔인) 용해에게 다짜고짜 묻는다.

“너 병원 뒤지고 다닌다며?”

“복수해야죠.”

“뭐, 복수? 죽은 곽철룡이가 너네 아버지냐? 복수 같은 그런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으로다가 접근하면 안 되지 도끼로 마빡을 찍든 식칼로 배때지를 쑤시든 고기값을 번다, 이런 자본주의적인 개념으로 나가야지 에라이~”

아직 철저한 `사업`의 논리를 배우지 못한 한국의 조직을 아귀는 계몽해야 한다. 그는 자본주의를 알고 있다. 그는 복수 따위의 인간적인 감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복수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 고기값이라도 번다는 경제적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아귀는 자본주의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실천에는 속수무책이다. 그는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는 계명을 놓치고 말았다. 그랬기에 그의 `손모가지`는 `날아가 불고` 만다. 자본주의적 `승부`는 너의 오감, 나아가 너에 대한 너의 신념까지도 버리고, 완벽히 이성적인 생각으로 접근하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이익과 손해의 더하기 빼기 놀이에 철저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니 여기에 인간적인 감정이 낄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장면 셋, `대부`

조카의 세례식날, 대부 마이클은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위해 마피아의 4대 보스인 타탈리아, 바지니, 쿠네오, 스트라치를 모두 처치한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바지니와 공모한, 패밀리의 초창기 멤버였던 테시오를 죽이기 위해 변호사이자 조직의 고문인 톰 하겐을 보낸다. 톰 하겐이 부하들을 데리고 테시오를 둘러싸자 자신의 계획이 일그러졌음을 알게 된다.

“단지 사업이었다고 전해줘, 항상 마이클을 좋아했지.”

“알고 있을 거요.”

“옛정을 생각해서 목숨은 살려주면 안 되겠나?”

“미안하오, 샐리.”

마이클을 죽이려 했던 것은 단지 사업(이해관계)이었을 뿐이라는 테시오의 당당함. 내 죄가 죽을 죄이언정,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테시오의 비굴함. 마이클을 좋아하지만 사업 때문에 그를 죽이려했다는 저 당당함 속에는 `사업`은 있으되 인간은 없다.

사업 속에 `인간적 감정`이 끼면 안 된다는 것은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마이클은 테시오를 죽여야 하는 것일까. 복수는 법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일 것이다. 살인한 자 역시 살해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물론 가장 단순하며 가장 원초적인 합리주의이기도 하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은 죽었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인데, (더욱이 테시오가 마이클을 죽인 것도 아니고 시도만 했을 뿐인데) 죽였으니까 (혹은 죽이려 했으니까) 그를 죽인다면 조직으로 보았을 때는 `1-1`이 아니라 `-1+(-1)`이지 않은가.

오해하지 말 것. 마이클이 테시오를 죽인 것은 분노와 같은 인간적인 감정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패밀리의 기강을 바로잡고, 초짜 보스의 미숙함을 감추고, 공포를 통해 권위와 위엄을 구축하기 위한 철저히 계산된 사업적 살해다.

테시오의 사업에 `인간`이 없었듯 그를 기다리는 죽음 앞에서 역시 `인간`은 빠져 있다. 마이클은 철저히 사업적인 이유로 테시오 당신을 죽인 것이니 당신 역시 이해해줄 것.

△장면 넷, 마르크스

벽난로를 피울 형편도 되지 못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저택이 있다.

이미 가난, 굶주림, 추위 이런 것들로부터 네 아이를 빼앗긴 사십 줄의 가난한 남자 마르크스, 그는 남은 두 딸, 예니와 로라를 지킬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아이들이 추워서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면, 그는 아이들 방에서 그들이 잠들 때까지 놀아주는 늙고 무력한 아비다.

그러한 어느 밤, 아이들은 당시 유행했던 `고백게임`을 한다. 게임방식은 딸들이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덕목은?”이라고 물으면 마르크스는 여기에 답하면 된다.

이 질문에 대해 그는 “단순성”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때의 물음과 대답들 몇 개를 뽑아보면 “아버지가 생각하는 행복은? 싸우는 것,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로라, 예니,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 등등이 있다.

이런 것들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

“Nihil humani a me alienum puto(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자식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가난 속에서, 그런 가난으로 몰아가는 삶 속에서도 못난 남자는 여전히 믿고 있다.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나와 관계되어 있다. 모든 것들이 나와의 관계망 속에 놓여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익으로 환원할 수 있겠는가, 거기 어디에 이익을 놓을 자리가 있겠는가, 어떻게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끼어들 자리가 있겠는가. 어찌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쿨 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한 이 팔불출의 아저씨는 평생 가난 속에서 죽었으되, 죽지 않는 인간이 되어, 정신의 벽난로가 되어, 아늑하고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