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술만 마시면 `미친 개`가 되는 스물여덟 살 재벌 3세가 제 버릇 못 버리고 또 까불었다. `국내 최대` 법무법인 신입 변호사들과 술 마시다가 남자 뺨 때리고, 여자 머리채를 잡았다. “아버지 뭐 하시냐, 허리 꼿꼿이 세워라, 나를 주주님이라고 불러라” 등의 `꼰대짓`과 `갑질`도 빼먹지 않고 살뜰히 다 했다.

대기업과 법무법인은 어떻게 유착돼 있을까. 똥과 파리? 시체와 구더기? `베테랑`이라든가 `내부자들` 또는 `부당거래` 등 영화에서 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폭행과 폭언 수모를 당한 피해자들 중 어느 누구도 한화 그룹 3남 김동선씨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하는 걸 보니 알만 하다. 법조인들이 범법자를 싸고돌며 `정의`보다 `돈줄`과 `빽` 지키기에 급급해하는 동안 사건은 세상에 아예 알려지지도 않았다. 재벌 주폭(酒暴) 난봉질은 지난 9월의 일이라고 한다. `난봉`은 언행이 허황하고 착실하지 못하며 주색에 빠져 행실이 추저분함을 의미한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과시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일까.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나에게나 중요하지 타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은 쉽게 과시하지 않는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타인 위에 군림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도 본 적 없다. 건방지고 예의 없고 함부로 손찌검하고 물건 집어던지는 게 다 못 배워서 그런 거다. 부모에게 제대로 못 배우고, 학교에서 딴 짓하고 노느라 책 한 줄 안 읽고, 주변에 쓴 소리하는 선생 하나 없고, 어려운 일에 부딪쳐본 적 없고, 자기 힘으로 노력해 무언가 성취해본 경험도 없는 미숙하고 불쌍한 인간이다.

며칠 전, 글 쓰다 새벽에 출출해 근처 24시 순댓국집에 갔다. 건너편에 아주 소란스럽게 떠들며 술과 밥을 먹는 남자 둘, 여자 하나가 있었다. 20대 중후반쯤으로 보였다. 남자 둘은 몸에 문신으로 미술작업을 했고, 여자는 그 중 하나의 아내다. 대화 소리가 하도 큰 바람에 알고 싶지도 않은 남의 사생활을 들어 알았다. 입만 열면 욕설이고 데시벨이 지나친 고성이었다. 저들끼리 장난치고 싸우다 밥그릇을 던지기도 하고, 깡패입네 칼을 몇 방 맞았네 사시미칼 어쩌고저쩌고하며 깔깔거렸다. 밥맛 떨어졌지만 참고 먹었다. 점잖게 말해봤자 알아들을 리 없고, 내 쪽으로 술병이나 집어던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게 그런 경우다.

가진 것이라고는 객기와 만용, 자기보다 약한 사람한테나 먹히는 싸움 실력이 고작일 텐데,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여겨 목소리 커지고 다리 떨고 개차반이 된다. 자기 엄마와 통화하는데도 말끝마다 욕이다. 엄마가 잘못 키웠다. 문득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이 깡패도 재벌 3세 앞에서는 공손히 두 손 모으고 굽실거리겠지, 재벌 3세도 칼 찔릴까 무서워 이런 망나니는 못 건드릴 거야. “저 싸움 잘합니다!” 전 국민에게 앙상한 `알통`을 과시한 개그맨 신종령까지 같이 모여 술 마시면 어떤 풍경이 벌어질까?

나도 허우대 믿고 어깨 힘주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는 운동하러 간 복싱 체육관에서 정말 왜소하고 살이 하얀 중년의 어른이 샌드백을 치는데 온 체육관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파워풀했다. 무서웠다. 그걸 보고나서부터는 절대 힘 믿고 까불거나 다른 사람을 얕잡아보지 않는다. 꼭 `인생도처유상수`라서가 아니다. 과시하지 않아도 배어나는 예의와 겸손, 절제, 인내야말로 진정한 힘인 까닭이다.

예의, 겸손, 절제, 인내의 훈련이 잘 되어있는 사람을 보면 그가 어떤 어려움과 싸워 이겼는지, 어떤 절망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지, 어떤 용기로 도전하고 성취했는지 한눈에 보인다. 그래서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진다. 이국종 교수 같은 분에게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