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 박수영 지음·중앙북스 펴냄 에세이·1만3천원

여름 어느 날. 길고 검은 머리칼과 까만 눈동자를 가진 조그만 동양 여자 하나가 스웨덴 웁살라 중앙역에 도착했다.

커다란 여행가방 2개엔 40kg에 육박하는 무거운 짐이 담겨있었고, 양 손에 들 수 없어 어깨에 가로질러 멘 노트북컴퓨터의 무게도 만만찮았다. 하지만, 여자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몇 해 전 영국 여행에서 미리 체험한 유럽 남자들의 친절을 믿었기 때문이다. 런던 지하철 계단에서 끙끙거리며 짐을 옮길 때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신의 큼직한 가방을 대신 들어주던 신사도를 스웨덴에서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낑낑대며 플랫폼을 거쳐 역을 빠져나갈 때까지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건장한 스웨덴 사내들 중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여자가 스웨덴 남자들의 첫인상을 `차갑고 매몰찬 등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녀를 돕지 않았을까? 어떤 이유가 있어 스웨덴 남자들은 여자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인간적인 매너를 발휘하지 못했을까?

위에 소개한 일화는 소설가 박수영이 직접 겪은 것이다. `매혹` `도취` 등의 장편소설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혀가던 그녀는 마흔 셋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스웨덴으로 건너가 웁살라대학에서 유럽 현대사를 공부했다.

말수 적고,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는 박수영. 그녀 안에 어떤 들뜬 열망이 숨겨져 있었기에 천리타국 먼 곳에서 `존재의 방향전환`을 도모한 것일까?

책은 2년 6개월의 스웨덴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박수영이 위의 질문에 내놓은 답변으로 읽힌다.

책의 부제는 보다 구체적이다. `북유럽에서 만난 유쾌한 몽상가들`. 이 책은 여행기나 체류기라기보단 한 작가의 꿈과 지향에 대한 고백서로 읽힌다.

기자에게 스웨덴은 실물이 아닌 추상으로 존재했다. 나라 이름을 입 속으로 중얼거릴 때면 `길버트 그레이프`를 연출한 라세 할스트롬 감독이 떠올랐고, 독특한 시각으로 뱀파이어를 해석한 `렛 미 인`에서 화면 가득 펼쳐지던 눈 덮인 북유럽의 쓸쓸한 풍광이 그려졌을 뿐이다.

스웨덴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는 건 다수의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 나라의 정치제도와 역사, 사회민주주의 전통, 여기에 공존하는 시니컬과 다정다감을 제대로 알고 있는 독자 역시 많지 않을 듯하다.

▲ 박수영 작가
▲ 박수영 작가

그런 이유에서다. 그곳에 머물며 인간과 세계를 꼼꼼하게 들여다본 박수영이 들려주는 진솔한 자기고백은 추상이 아닌 실체로서의 스웨덴을 이해하는데 기여한다.

책은 국적과 나이, 인종이 각기 다른 7명의 웁살라대학 역사학과 학생들의 일상에 밀착해 전개된다. 그들의 사랑과 실연, 사소한 것에서 발견한 행복에 기뻐하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공감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박수영은 `즐거움`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스웨덴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표면적 일상에서 인간과 세계의 내면적 비밀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이 여타의 가벼운 여행서나 해외 체류일기와 변별되는 가장 큰 미덕이다.

가진 자가 오만하지 않고 가난한 자는 비굴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부(富)가 개인적 능력이 아닌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회제도에서 탄생한다고 믿는 스웨덴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펴든다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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