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순희수필가
긴머리를 짧게 잘랐다. 다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 심지어 부산에 살고 있는 언니는 카톡 대문사진을 보고 놀라서 전화를 걸어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오래 기른 것을 싹둑 잘라버린 것이냐며 맛난 것 사 먹고 마음 달래라고 용돈까지 보내왔다.

사실은 별 뜻 없이 어제보다 좀 산뜻한 오늘을 맞이하려고, 무거워서 잠시 쉬어가자는 느낌으로 미용실에 들어갔다. 십여 년 단골로 다녀 내 스타일을 잘 아는 원장님도 짧게 잘라내기 전에 몇 번을 되물었다, 아깝지 않느냐고. 금방 길 것이니 과감하게 가위질을 하라고 하니 그제야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내가 머리스타일을 바꾼 이유는 `그냥` 이었다. 하지만 만나는 이마다 자꾸 명확한 이유를 말하라고 하기에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답을 정해보았다. 새로운 인생관을 가졌다는둥 실연당했다는둥 너스레를 떨어주었다.

긴머리 모양을 수십 년 간직하듯, 나는 무엇이든 시작하면 오래 하는 편이다. 수필 또한 그랬다. 시나 소설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수필`을 쓰게 되었느냐, 뭐가 그리 좋아서 십 년 넘게 매달리느냐고 가끔 물어온다. 그럴 때 내 대답도 `그냥` 이다.

서른 즈음에 시작했으니 내 년이면 벌써 강산이 두 번 바뀐다. 그 사이 같이 시작한 친구들과 동인이 되었고, 몇 해 지나고부터는 동인지를 만들어 그 해 공부한 글들을 엮기 시작했다. `포항수필사랑`이라는 멋진 이름표도 달았다. 동인지가 책꽂이에 열 권이 꽂혀있으니 이것도 오래한 여행이다. 잘 쓰기 위해 수필을 배운지도 십 년이 넘는다. 천재적인 소질이 없는 나같은 사람은 그만두지 않고 묵직하게 오래 배워야 한다. 배울 때에는 세 선생이 필요하다. 하나는 앞서 글을 먼저 만난 선배이고 그 다음은 다독과 잘 쓰는 것이다.

글을 잘 쓴다고 알려진 작가들이 말하는 노하우는 대부분 많이 쓴다는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을 정해 컴퓨터 앞에 앉아 A4 용지 한 장을 채운다는 사람, 사물 하나를 정해 그것을 유심히 관찰해서 묘사하기를 매일 반복한다는 사람. 방법은 달라도 다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잘 쓰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다.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쓴 일기장이 한가득이고, 결혼 후에는 등장인물이 몇 명 늘어서 소재도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종이에 쓰던 것을 십 년 전부터는 SNS에 기록했다. 장점이라면 글에 사진을 붙여 놓으니 내용이 더 풍부해졌다는 것과 친구들이 댓글로 공감해주는 일이다.

오늘도 저녁을 준비하며 하루를 되새김질 한다. 압력솥이 밥 익는 소리를 내느라 칙칙 거린다. 하지만 난 가스 불을 끄지 않는다. 1단으로 줄여 5분정도 더 열을 가한다.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누룽지를 만드는 과정이다. 나는 잘 된 밥보다 꾸덕꾸덕한 누룽지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나와 남편, 아들 둘 이렇게 네 식구 밥을 풀 때에도 내 밥은 맨 나중이다. 세 공기를 덜고 나머진 밥통에 옮겨 담고 바닥에 붙어 있는 누룽지를 손목에 힘을 주어 긁어낸다.

수필은 누룽지와 같다. 쓰기는 내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눌어붙어 있던 감정들을 박박 긁어내는 작업이다. 급하게 불을 끄고 김을 빼면 글은 미완성이 된다. 눌어붙길 기다리며 콧노래를 부르고 식탁위에 수저도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국그릇까지 상에 오른 다음 퍼야 한다.

포항수필사랑은 올해로 11집이라는 누룽지 한 그릇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제부터 만나는 이들에게 구수한 누룽지를 배달할 것이다. 하지만 매해 동인지를 받아 읽고서도 나에게 시인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있을 만치 수필은 푸대접이다. 그러함에도 나는 한눈팔지 않고 수필 곁에 `그냥` 머물 것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 왜 사랑 하냐고 했을 때 그냥, 너니까! 구구절절한 이유보다 이런 간단명료한 대답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냥, 수필이니까, 포항수필사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