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 분다. 바람은 공기들의 빈틈을 향해 불어온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불어와 빈 곳을 채우고 다시 빈 곳을 향해 나아간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사랑도 움직인다.
▲ 바람이 분다. 바람은 공기들의 빈틈을 향해 불어온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불어와 빈 곳을 채우고 다시 빈 곳을 향해 나아간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사랑도 움직인다.

“세상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그 자체가 이미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중략… 그러므로 있고 없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노자, `도덕경` 2장 부분)

대상의 특성은 대상의 내부에 존재할 수도 대상의 바깥에 존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성질의 드러남의 계기다. 그 계기가 곧 만남이다. 선, 악, 미, 추, 장, 단, 음, 성, 전, 후와 같은 특성들이 대상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바깥에 존재한다. 대상과 대상의 비교 속에서 그러한 성질들이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이미 대상 속에 선, 악, 미, 추, 장, 단, 음, 성, 전, 후와 같은 성질들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특정한 것과 관계를 맺으면서 어떤 것은 더 크게 어떤 것은 더 작게 발현된다.

대상의 내부에 그 특성이 있는가, 바깥에 그것이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만남과 연대다. 이것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내가 있음을 앎으로 네가 있다는 것 역시 의식하게 된다.

△사랑: `봄날은 간다`(이영애와 유지태)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 서울에서 술을 마시던 유지태가 이영애와 통화를 하더니 기어이 강릉으로 가고야 만다. 기다리던 이영애가 살짝 지겨워지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멀리 택시 불빛이 들어오고 유지태가 내린다. 이영애가 그리움의 크기라도 보여주겠다는 듯이, 마치 그러려고 그랬다는 듯이 멀찍이서 달려온다. 유지태가 마주 달려가 그녀를 격렬히 안아 올릴 법도 한데 그는 뛰어오는 그녀를 바라만 본다.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하면서. 이영애는 뛰어오던 속도 그대로 유지태에게 뛰어들 법도 한데 걸음을 늦춘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온 밤을 달려온 남자와 그 남자를 밤이 파랗게 패이도록 기다린 여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그들은 그저 서로를 바라만 본다. 무려 5초나 말이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을 향해 걷는다. 포옹도 없이 걷는다. 아니 가까워지기 위해서 그들은 앞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걸었다. 세 발자국도 걷기 전에 이영애가 뒤돌아본다. 유지태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영애의 몸뚱이만한 팔을 내밀어 그녀를 끌어당긴다. 이영애의 허리가 부러질 듯 꺾인다.

저들의 격렬한 포옹이 있기까지 왜 저들은 그토록 오랜 시간을 흘려보낸 것일까. 마치 말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들은 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은 그 20초 동안 아마 단 한 번도 숨을 쉬지 않았을 것이다. 숨 막힐 듯한 시간 속에서 그들의 숨 막힐 듯한 사랑이 요동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막힌 숨이 터져 나올 때까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이 스스로 터져 나올 때까지 기다려진 시간. 기다린 시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기다려지게 된 시간과 그녀의 꺾여진 허리의 각도만큼, 더 꺾이고 싶어도 꺾일 수 없는 그 각도만큼, 그리하여 그들의 몸과 몸이 닿아도 닿지 않은 그 틈만큼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한다.

△이별: `바람이 분다`(이소라)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중략…

내게는 소중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바람이 분다` 가사 부분

이별은 그 순간에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헤어스타일을 바꾼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바람이 불어오고 눈물이 터져 나와서야 그것이 이별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별이라는 사건은 `나`의 인식범위를 초과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감이지 인식은 아니다. (적어도) `나`의 이별은 그러하다.

“찬 빗방울”은 무수한 말의 입구이자 출구다. 최초의 빗방울이 `나`를 때린 이후에 `나`는 우리의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너`로 기인한 `나`의 세계가 무너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가 오는 하늘”은 `나`와 `너`가 함께 숨쉬었던 그런 세계가 아니다. 지금 `나`는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인식 불가능한 하늘, 하늘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을 대면하고 있다. 저 비는 내가 알던 세계에서 내리던 비가 아니다. 그러니 비에 감정을 이입할 수도 없고, 저 비로 `나`의 슬픔을 위로할 수도 없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무엇보다 너는 `나`가 선명히 느끼고 있는 이 이물감을 `너`는 알지 못한다. `너`와 함께 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너`로 인해 행복했었다. `나`는 그것을 우리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너`와 `나`의 사랑의 아름다운 순간들로 구축한 그런 아름답고 찬란한 행복말이다. 이러한 행복의 한 축을 지탱하던 `너`라는 기둥이 떠나자 `나`의 행복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폐허 속에서 `나`는 진실을 대면하게 된다.

“내게는 소중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이 말을 간단히 풀어쓰면 `너`에게 오늘은 어제와 다를 바 없다. 오늘은 헤어진 날이고 어제는 헤어지기 전인데 어제와 오늘이 같다는 것은 `너`는 `나`와 항상 헤어져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히스테리를 부릴 만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니가 나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만 웃고 사랑을 말하고 또 그렇게 날 싫어해 날”(`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이 말은 `나는 너를 죽도록 사랑해서 증오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네가 없는 이곳에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이제 `나`는 선택해야 한다. 변화된 헤어스타일을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이별을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무너진 세계를 다시 구축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세계가 무너져 내릴 때 햄릿은 전자를 택했고, 오필리어는 후자를 택했다. 둘은 죽었으므로 결과는 동일하다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절대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