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트라우마 시달리는 포항 사람들
작은 소리·충격에도 `깜짝깜짝`… 땅멀미 시달리기도
생존배낭 꾸려놓고 일주일째 선잠… 일도 손에 안잡혀
아내·아이 친인척집에 대피시킨 `기러기아빠`도 속출

“홀몸이 아니라서 더 불안하고 너무 무서웠어요. 가뜩이나 입덧 때문에 어지럽고 잘 먹지도 못했는데 15일 오후 쿵쾅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깼을 땐 규모 5.4의 지진이었어요. 그날 이후 가만히 있어도 속이 울렁거려요. 시간마다 잠에서 깨고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졌지만 약도 함부로 먹을 수 없어요.” 22일 포항시 북구 여성아이병원에서 만난 임신부 A씨(34·북구 장성동)의 호소다.

여성아이병원 관계자는 “막달 임신부가 샤워하다 지진을 느끼고 아파트를 뛰어내려 온 사례도 있었다. 욕실이라는 공간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병원 측은 이날 무사히 아이를 출산한 이 산모와 아이가 퇴원할 때까지 진료비를 무료 지원키로 했다.

포항에 `지진공포`가 엄습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여진은 그칠 줄 모른다. 지진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trauma)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매일 아침 이웃과 나누는 첫마디는 “밤새 안녕하셨어요?”로 바뀌었다. 삼삼오오 모인 곳마다 화두는 온통 지진이다. 주민들은 “너무나 무서웠고 지금도 불안하다”고 말한다. 강도가 컸던 만큼 지진이 휩쓸고 간 `정신적 여진`은 상상 그 이상이다. 특히 진앙지에서 가까운 북구지역 주민들은 작은 소리나 충격에도 깜짝 놀라거나 잠을 자다가도 불안함에 깨며 지진공포증을 앓고 있다. 실제 진동이 없는데도 땅이 흔들리거나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땅멀미`에 시달리는 경우는 다반사다.

`그날` 이후 매일 눈물바람 중인 주부 홍모(37)씨는 “지진 당시 유치원에 있었던 6살 아들이 밤에 잠을 자다 갑자기 깨서 무서운 꿈을 꿨다며 꺼이꺼이 우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며 “혼자 화장실도 못 가고 물 마시러 주방에도 같이 가달라며 조른다.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볼 때마다 속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고 털어놨다. 15개월 된 딸을 둔 김모(28)씨는 “그날 이후 긴장 때문인지 배가 자주 아프다. 밥도 안 넘어가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덜덜 떨린다”며 “말 못하는 아이 심정은 오죽할까 싶어 답답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생존배낭을 꾸려 놨다는 주부 손지형(42·북구 양덕동)씨는 “낮엔 가급적 집밖에 나가 있다가 저녁엔 거실 불을 켜놓고 외출복을 입고 잠을 잔다”며 “남편이 더 불안해해 두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팬션이나 휴양림, 캠프장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진은 포항지역 남성들의 일상도 통째로 바꿔놨다. 고향이나 친인척 집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대피시키고 졸지에 `기러기아빠` 신세가 됐다. 철강공단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이호명(39)씨는 “그날 저녁 아내와 두 딸 모두 처가인 울산으로 보냈다”며 “여진 진동보다 소리가 더 무서워서 매일밤 TV를 틀어놓고 잔다. 아내는 울산에 있으면서도 트라우마 때문인지 윗집 문소리, 발걸음 소리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전했다. 이씨와 같은 경우가 한두명이 아니다. 이참에 지진보험에 가입하려고 했지만 보험사로부터 “장성동, 양학동, 흥해읍 거주자는 가입이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덧붙였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정신적 외상에 취약한 아동이나 청소년, 임신부, 노인 등 고위험군의 경우 불안·짜증·무력감 같은 스트레스 반응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진으로 인한 불안감이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최소 한달 정도 현장을 떠나 있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여성이거나 나이가 어릴수록 증상이 심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가들은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거나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에서 심호흡이나 복식호흡, 스트레칭을 자주 하면 스트레스 반응을 줄여 불안감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하나마음정신건강의원 김태현 원장은 “가족이나 동료, 이웃과 자주 이야기 나누고 공감하며 용기를 북돋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최근엔 지진 스트레스에 밤잠을 설쳐 수면제 처방을 받으러 오는 환자들이 늘었다. 트라우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으로 증상을 방치하고 치료를 미루면 나중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민정기자 hykim@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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