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창원수필가
1990년대 말, 우리 사회에 몰아닥친 IMF 사태는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왔다. 대학 인문학 관련 학과 지원자의 감소, 교양과목의 축소, 취업 불안이라는 구체적 현상을 통해 나타났다.

그러고 나서 20년 가까이 흐른 요즘, 새로 인문학의 열풍이 불고 있다.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단 강좌가 여기 저기 개설되고, 지자체마다 `인문도시`를 만들겠다고 나서고 있다. 기업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채용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많은 지자체들이 인문도시 간판을 내걸고 있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현 시점에서 종전의 물적 성장 위주의 성장 정책은 더 이상 시민들에게 도시의 비전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시민들에게 행복감을 주는 데 인문학인 처방이 필수불가결의 요소라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포항시에서도 최근 `미래를 여는 환동해 역사문화도시 포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과 손잡고 `영일만 친구, 인문학에 철들다`라는 주제의 인문도시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에서는 포항의 인문역사자원 발굴과 재발견을 통해 철강도시 포항을 역동적인 문화도시로, 소통과 공감의 인문역사문화도시로 변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3년간 인문강좌, 인문체험, 인문축제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인문학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프로그램을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시민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인문학, 청소년인문학콘서트, 지역아동센터 및 공장근로자, 농어촌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찾아가는 인문학` 등의 인문강좌와 지역의 인문학적 자산을 공유하는 인문체험, 인문축제 프로그램을 연차별 주제(1차년도:빛, 2차년도:철, 3차년도:바다)에 따라 운영한다.

특히 지난 10월 31일부터 11월 4일을 인문주간으로 설정, 포항시 곳곳에서 `빛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개막식, `포항의 빛을 찾아서`라는 주제의 인문학 토크콘서트, `빛으로 수놓다`라는 주제의 전시회, `포항, 미래의 빛을 만나다`라는 주제의 현장+토크, `포항의 빛을 찾아 떠나는 기행`이라는 주제의 스토리텔링 테마기행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행사의 종류만 보고 있으면 포항이 어느새 인문도시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포항이 인문도시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인문도시를 지향하는 포항시의 인문환경을 들여다보면 열악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인근 도시에 비해 역사·문화적 자원이 참으로 빈약하다. 그리고 수십 년 간 채색된 철강도시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 인문도시라는 이미지는 아직 어색하기만 하다. 행정조직도 인문도시 지향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앞서나가는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인문도시사업단이나 인문도시담당관이라는 조직도 없다. 인문학 연구역량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다. 지역 대학에 관련 학과가 없고, 민간 연구기관도 부족하다. 인문학을 진흥시키려는 예산도 턱없이 모자라고, 사람들의 인식 수준도 낮다.

인문도시란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도시`이며 동시에 `인간다운 인간이 만드는 도시`라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랜 전통과 매력 있는 문화, 휴머니즘의 정신과 민주주의의 정신, 아름다운 경관 등의 인문환경과 시민들의 인문역량을 두루 갖춘 도시라 할 것이다.

인문학이 우리들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틀림없다면 멀다고, 험하다고 이 길을 포기할 수는 없다. 빈약한 역사·문화적 자원은 하나씩 발굴하여 소중하게 챙겨야 한다. 인문학 연구 인력도 많이 양성해야 한다. 효율적인 업무를 위한 행정조직도 필요하다. 생색내기가 아닌 실질적인 예산도 만들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라야 인문학이 자랄 수 있다.

현재의 인문도시 사업은 마중물이다. 눈앞의 성과에 얽매이지 말고 멀리 내다보면서 뚜벅뚜벅 가야 한다. 그 성과는 20년, 30년 후에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