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수정봉의 거북바위.
길을 따라 30여분 오르면 그 이름도 청아한 수정봉(水晶峰). 단아한 해서 체로 세 글자가 아름다운바위 봉우리가 나온다.

여기가 수정봉이다. 마주보는 산이 화기가 넘치는 형국이라서 수기(水氣)를 담고자 이리 이름 붙였다 한다.

옛 문인 선비들이 많이도 다녀가셨다. 그이들이 남긴 이름 석자가 가득하다. 이 길을 바로 따라 조금가면 넓은, 한 백여 명은 능히 놀 수 있는 마당바위가 있다. 크게 두개의 층으로 되어있다.

아래바위가 더 크고 넓다. 약 440㎡의 널찍한 바위 위, 그 오른 편에 연 꽃잎의 일부를 묘사한 듯한 선각이 있다. 내내 나린 비가 그 끝에 고여 있으니, 꽃잎 끝에 맺힌 이슬 마냥 새롭다. 그래서 수정처럼 아름다운 봉우리이다. 그 옆에 무너진 탑재 4점이 흩어져 있다.

과거 이곳은 원족(遠足)나와 관풍(觀風)하는 선비들의 유람 터가 되었다.

그 흔적들이 먼 경치도 보고, 시상(詩想)도 가다듬으며 기대어 사색하던 난간자리로 남아있다. 차일 쳤음직한 구멍도 보인다.

그 날, 그 자리의 선비님은 어떻게 놀았을까? 날아갈듯 옥양목 두루마기에, 표표히 날리는 고운 고름같이, 그렇게 바람처럼 원유하고 가셨는지 모른다. 아슴프레 눈가에 그런 경개 하나를 그려본다. 거북바위는 여기에 얹혀있는 위층에 해당하는 바위가 그것이다.

왼쪽으로 난 길로 오르노라면 거대한 남근(男根)바위 하나가 하늘을 향해 '홰'를 치고, 그 바위를 부드럽게 스치며 돌아보면 이것이 바로 거북의 머리, 귀두(龜頭)가 된다.

원래 귀두와 남근은 동일시했다. 형상과 생태의 유사함이 같은 성격으로 비정 되었다. 그곳에 거북의 얼굴을 새기면서 양자동격임을 이쪽과 저쪽에서 동시에 구현해 버렸다.

지름 20㎝의 타원에 가까운 두 눈. 5㎝의 콧구멍 두개. 끝이 올라감으로 웃고있는 가로43㎝로 긴 입과 목의 자연스러운 주름은 보는 이로 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등판의 오른 쪽에는 귀갑문을 남겼다.

오른쪽에 집중된 무늬는 엉덩이 부분에 엉성한 선각 여러 개가 서로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귀갑의 시문을 이루어 내고, 어깨에서부터 엉덩이까지 테두리의 무늬를 함께 새겨 놓았다. 왼쪽 엉덩이에는 4기의 비교적 큰 바위구멍을 남기면서 등판에는 빗물이 고이지 않게 네 줄의 고랑을 다듬었다.

거북의 중심부 역시 두 곳을 손봤다.

현종7년 1666년 건립의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비석이다. 여기에 이르길, '수정봉 꼭대기에 거북봉이 있어 머리를 서쪽으로 향한 때문에 중국사람이 그 모양을 보고는 중국의 재물이 날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는 까닭이 바로 거북머리 때문이라 하여 그 머리를 잘라 버리고 거북의 등에다 10층탑을 세웠다'는 전설을 소개하였다.

또 '떼어낸 거북머리를 1653년 옥천군수 이두양이 승려 각성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다. 그후 충청병사 민진익이 관찰사 임의백에게 알려 10층탑을 헐어버렸다'고 남겼다. 그렇다면 흔적 중에서 거북의 중심부에 있는 정으로 다듬어 사각형으로 보이는 터가 10층 탑지가 되고, 아래에 흩어진 석재는 탑제가 분명해 진다.

거북의 목 역시, 부러진 것을 아래에 베갯돌을 대고 이어 놓았으니 전설은 신빙을 더하게 되는데, 실지로 중국의 술사가 와서 이리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아마도 '억불'에 대한 훼찰을 그리 묘사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하우· 암각화 연구가>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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