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살로메
목련꽃이 진다. 떨어진 꽃잎은 나무 그늘에 작은 봉우리를 이룬다.

순결하고 고고한 생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상처의 무덤. 오점 하나 없이, 소리소문 없이 깨끗한 생을 마감할 것 같은 저 흰꽃도 결국은 흉물스런 흔적을 남긴다.

그 꽃 무덤을 지나칠 때면 오래된 영화 ‘매그놀리아’가 떠오른다.

‘매그놀리아’는 목련꽃을 뜻한다.

한 송이의 활짝 핀 목련꽃 포스터가 인상적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여섯 개의 꽃잎은 누렇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영화는 그 꽃잎처럼 상처 입은 영혼들을 노래한다.

수많은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로즈니, 릴리니 하는 꽃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이 상처의 키워드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무리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도 지고 나면 흉물스런 상처를 남긴다. 생의 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곧 상처의 길을 보듬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렇다면 상처의 고향은 어디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는 그것이 우연이라는 메시지로 와 닿는다.

우리가 주고받는 상처의 대부분은 우연에 의해서 생긴다. 어디선가 불어온 돌개바람 한 점에, 봄을 재촉하는 우연한 단비에 꽃잎은 떨어진다. 화려한 꽃이 흉물스런 꽃 무덤이 되기까지는 지극히 우연적인 자연현상이 있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우연의 산물인 그 상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허방을 짚는 것과 다름 아니다. 단순 명쾌하게 우주 질서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고 보듬어 안으면 된다.

그런 눈으로 보면 목련꽃이 지는 건 더 이상 서러움도 추함도 아니다. 본시 자연은 아름다움이 그 실체가 아니라 무심함이 그 실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다.

문학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꽃 핀 나무든, 꽃 진 무덤이든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눈을 키워 가는 것.

조금만 예민한 독자라면 꽃 핀 나무만을 보고 감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거짓 평화, 억지 웃음을 노래하는 것과 같다. 꽃이 진 자리, 즉 생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힘이 없는 문학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꽃이 진 땅까지 무심하게 내려가는 노력이 문학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소개해준 글에서 ‘모든 진실은 부뚜막에서 죽는다’라는 말을 발견한 기쁨이란!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때론 도마 위에서 털이 뽑히고, 토막 나고, 튀겨지고 절여진 채 올라오는 밥상과 같다. 진정한 글쓰기는 이런 가공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이다. 도마에 오르기 전 비리고, 꿈틀대고, 헐떡이며 때론 썩어 가는 이 모든 날것의 실체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진정한 글쓰기의 본질이다.

비단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사물이나 사람을 그릇 이해하고, 어림없는 오해로 타인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솔잎처럼 작고 뾰족한 우연들이 모여 상처가 된다. 그 상처가 풍화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것을 견디기 위해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고, 나 같은 사람은 글을 쓴다.

T.S 엘리엇이 말했다는 좋은 작품은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라는 말은 적어도 내게 유효하다. 이해되지 않고 전달될 수 있는 글이야말로 날것의 실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도 좋은 날것의 재료이다. 도처에 자리잡은, 위선으로 충만한 인간의 폭력성은 상처를 낳는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상처는 곧 떨어진 꽃 무덤처럼 깊은 사유의 봉우리를 쌓게 하니까.

짧은 봄날, 꽃 무덤을 보면서 깨친다. 꽃이 진 자리에 남아있는 상처는 더 이상 슬픔이나 추함이 아니다.

진실은 아름다움도 추함도 아닌 무심함의 세계이다. 건조하지만 깊이 있는 그 시선을 확보하려는 몸부림. 그것이 문학하는 괴로움이자 즐거움이다.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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