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금동미륵대불. 1990년 도금하기전 점안의식에서 미륵불이 발광했다.
지명산이라거나 이지산, 자하산, 구봉산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속리산은, 최고봉인 천황봉을 위시해서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의 8개 봉우리를 안고 있다.

그 수정봉 아래에 천년고찰 법주사(法主寺)가 있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스님이 천축에서 공부한 후, 흰 노새에게 불경을 싣고서 서라벌로 돌아왔다.

널리 부처의 법을 전하고자 스님은 전국을 돌아다니시기를 어언 여러 해. 의탁할 곳을 찾지 못하여 이곳까지 당도한 스님에게 흰 노새는, 여기에 이르러 크게 울부짖었다.

스님, 그윽한 생각으로 산세를 보니 능히 가람이 들어설 자리라 여기 절을 지었으니, 이 절이 법주사이고. 불법을 머물게 하였으니 이름도 법주사가 되었다.

경내에는 '추래암'이라 하여, 수정봉 신이 굴러 버렸다는 따로 떨어져 나온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는 보물 제 216호 마애 여래상이 남아있다.

마애상은 경주 남산의 삼화령 본존과 같이 흔치않은 의상(椅像)조각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잘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마애불 오른 쪽의 가로막힌 바위의 그림에 관심을 둔다.

여기에 법주사 창건설화가 암벽조각으로 새겨져 있어서 볼만하다.

여러 마리의 노새와 노새의 등에 불경을 싣고 가고 있는 승려의 모습이다. 마치 바위그림과도 같이 얕은 돋을 새김으로서, 마애 여래상으로 해서 다소 무시되듯, 한 켠에 수줍게 드러나고 있다.

법주사 경내에 청동으로 미륵대불을 새로 만들어 세웠다.

과거 1933년에 세운 김복진의 시멘트 미륵에서도 느껴지던 정감이, 새로 만든 33m 높이의 청동 미륵대불 앞에서는 생경한 마음이 되니 묘한 일이다. 시멘트가 문화재의 재료라면 거부감이 앞서는 것이 우리들인데도 전의 것을 회상하게 한다.

그래서 예술품에는 인공이 어쩌지 못하는 세월의 때가 끼고, 비나 바람, 구름과 태양의 참여가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1990년 미륵대불의 점안식(點眼式)이 거행되는 순간, 하늘의 태양둘레에 두 겹의 오색 테두리가 둘렀다고 한다.

아직은 눈에 익지 못해 그 중압감으로 마음 한쪽이 불편한 채 미륵불 뒤로 난 길을 오른다. 수정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이 길은 오래 전에 폐쇄되어, 절의 종무소의 허락을 얻어야 입산이 가능하다. 길 초입에 고려 충혜왕때 승려 자정국존(慈淨國尊)의 비가 석벽에 박혀있다. 그 앞으로 난 길이 폐쇄된 구 길이다.

인적이 드문지 오래라서 고개 숙이고 길 찾아 걷는 걸음에 절로 숨이 가쁘다. 낙락장송도 힘에 겨워 쓰러져 누운, 그 위로 아래로 다람쥐와 청설모도 다니고, 다래넝쿨 우거지니, 그다지 길지 않은 세월이라도 사람의 입김만 없다면 자연은 이내 회복되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든다.

<이하우·암각화 연구가>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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