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강백수밴드` 단독공연이 열린 공연장은 50명 남짓 들어갈 공간에 80여 명의 관객들이 들어차 열기로 후끈했다. 모두 얼굴이 환하고 행동은 편했다. 의자에 앉거나 벽에 기대거나 선 채로 공연을 즐겼다. 맥주를 마시면서, 연인을 끌어안으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연주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신이 난 강백수는 각종 현란한 춤까지 선보이며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흡사 영화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 또는 쿵푸팬더, 전설적 베이시스트 아브라함 라보리엘을 연상케 했다. 재담도 수준급이어서 그가 입을 열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같은 멘트라도 강백수가 하면 웃긴데, 신이 내린 `D자` 몸매와 임꺽정 형용임에도 어딘지 친근한 외모 덕분일 것이다. `백수와 조씨`로 초창기 활동을 함께 한 `조씨`가 뮤지션이라고는 볼 수 없는 철도공사 직원 내지 반도체공장 작업반장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남철-남성남` 급의 만담을 펼칠 때는 포복절도하는 이들마저 있었다. 그 `조씨`가 하모니카 연주로 강백수와 호흡을 맞출 때, 뮤지션의 광휘가 불꽃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에 감탄했다.

마지막 곡 `아이 해브 어 드림`과 앙코르곡 `삼겹살에 소주`가 울려 퍼지는 내내 모든 관객들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른바 `떼창`이라는 것이 공연장을 들썩이게 했다. 공연이 끝나도 여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며칠 술을 참았다던 그와 근처 포장마차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멋있었다고,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해줬다. 그의 음악과 술에 대책 없이 취해 집에 와 보니 코트 주머니엔 마늘쫑과 콩나물 몇 가닥이 들어 있었다.

강백수는 1987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밴드하면 여고 축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친구의 꾐에 넘어가 음악을 시작했다. 그렇게 가난한 인디뮤지션의 길을 걷게 된 데 대한 소회가 `하헌재 때문이다`라는 곡에 담겨 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글재주를 바탕삼아 한양대 국문과에 진학, 박사과정까지 공부를 하고 있다. 그가 쓴 노랫말에는 삶의 깊이와 통찰력, 시적 비유가 빛난다.

그는 흙수저 세대의 공통된 `찌질함`과 아픔, 꿈과 희망, 사랑을 노래한다. 그래서 청춘을 노래하는 뮤지션이다. “가수가 판검사를 어떻게 이겨”(`벽`)라고 부르짖거나 “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1991년으로 날아가 한창 잘나가던 30대의 우리 아버지를 만나 이 말을 전할 거야. 아버지 6년 후에 우리나라 망해요. 사업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요. 차라리 잠실주공5단지나 판교 쪽에 땅을 사요. 이 말을 전할 거야”(`타임머신`)라고 읊조릴 때, 가난한 청춘의 자화상과 IMF 세대의 슬픔이 환기된다. 그러나 현실의 비극에 주저앉아 패배를 수용하기보다 그마저도 유머와 추억으로 승화시키는 유쾌하고 따뜻한 시선이 그의 노래엔 있다. 강백수가 어떤 음악을 하는 지는 이 한곡의 노래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울산`의 노랫말을 옮기며 스탠드의 불을 끈다. 강백수, 청춘의 노래, 언제나 변함없기를.

“추운 겨울 날 내 나이였던 꽃다운 우리 엄마가 나를 낳은 곳.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가난한 우리 아버지가 달려오던 곳.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자그마한 텃밭을 일구던 남창마을에 장이 열리면 외할머니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다릴 건넜지. 외삼촌과 외숙모의 자그마한 식당이 있던 공업탑 로터리. 오빠야, 형아, 몇 밤 자고 가나 묻던 동생들이 살던 곳, 울산. 우리 엄마가 눈 감으시던 그 밤에 눈이 벌겋던 우리 외삼촌은 말했지. `엄마 없다고 외갓집을 잊고 살면 안 된다. 틈 날 때마다 울산에 오니라.` 세월이 흘러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 따라 하늘로 돌아가시고 이른 나이에 외숙모마저 떠난 집을 외삼촌 홀로 지키시고, 오빠야 오빠야, 하얀 얼굴로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사촌여동생 신랑을 만나 자그마한 핏덩이 하나를 기르는 곳, 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