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선생의 금석문이 충청도 어디에서 새로 발견되었다는 얼마전의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그분의 학문과 행적은 이미 전설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은 후학의 가슴에 남는, 아련한 동경이 있다. 선생이 산 이름으로 풀어낸 시 한 귀이다.
살기가 좋아지고 부터, 이제는 산이 오히려 속인을 멀리하고픈 시대이건만, 속리산은 세속을 떠난 숭고미와 정체 모를 신성이 늘 감싸고 있는 곳. 그래서 나도 옛 묵객을 닮아 산으로 든다.
속리산으로의 입산 길은 충북 보은으로 해서 말치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잘 닦여 있다. 상주 화북으로 가는 길도 좋다.
산을 보고자 할 시면 나는 화북 길을 권한다. 관광의 목적이면 아무래도 보은 길이 무난하다.
글쓴이는 첫 번째 입산 길을 화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산뿐 만 아니라, 아직도 5일장이 서는 화북장터와 향수처럼 와 닿는, 흔히 말하는 60년대 식의 작은 관광지의 쇄락한 여관과 점방, ‘도라지 위스키’를 여태 줄 것만 같은 다방을 보았다. 맛없는 식육식당의 짜기만 한 김치도 먹을 수 있었다.
큰 바위 아래로 난 길과 그 골짝으로 흐르는 물은 산이 왜 속리산인지를 알게 한다.
산과 물, 바람, 바위와 흙, 그 외의 내가 표현 못하는 많은 것을 이 산길에서 가질 수 있었으며, 모두 두고 올 수 있었다. 오랜 마음의 우울까지도.
‘층이 쌓인 것이 자연히 그러한 것이 높게 공중으로 솟았고, 그 높이는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3천의 사람이 둘러앉을 만 하고, 대 위에는 물구덩이가 동이만 하게 있어서,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비가와도 넘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 반공으로 흘러내리는데, 한줄기는 동으로 흘러 낙동강의 발원이 되고, 한줄기는 흘러 남으로 가니 금강이요, 나머지는 서쪽으로 가서 달 천이 되었다가 금천으로 흐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문장대에 대하여 이리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하기를, 세조가 수십 섬의 약으로도 회복되지 않는 병으로 여기에서 요양할 때, 월광태자가 현몽 중 말하기를, “동쪽으로 15리 올라가면 영봉이 있고 그곳에 올라가 기도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다”하였다. 그곳은 운장대(雲壯臺). 그 운장대 위에는 삼강오륜을 설파한, 한 권의 천서가 있어서 엎드려 기도한 후, 신하들과 강론했다. 이후로 모두 이르길, 문장대(文藏臺)라 한다고 복천사 사적에 나온다. 하늘의 부명이 세조에게 있음을 힘줘 말하려 한, 이런 전설은 다른 명산에도 여러 개 남아서 전한다.
문장대는 높이 1033m의 빼어난 암봉으로 되어 있다.
‘주작을 타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듯(정시한,丁時翰)’ 뭇 산들의 조복을 받는다.
어찌 보면 사자의 머리와도 같은 위엄을 지녔고, 또 어찌 보면 곱게 아미를 내려
깐 새 신부와도 닮아있다. 이곳에 거대한 바위 확과 매 바위, 거북바위가 함께 어울려 있다.
<이하우·암각화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