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우
충남 금산으로 가자.

그곳은 우리나라 인삼의 중요산지이다. 이 고장은 크고 작은 인삼밭들이 경작되고 있어서, 인삼의 수입으로 작은 읍으로서는 높은 소득을 올리는 곳이다. 그런 까닭으로 도심은 잘 정비되었으며,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읍내에서 영동으로 가는 68번 도로를 따라 약 5분여 가면 제원면 제원리 마을이다.

노변마을이 그렇듯이, 여기도 도로를 낀 곳이라 이미, 시골 마을의 규모를 벗어났다.

제원은 일찌기 역(충청, 전라, 경상도를 잇는 중요 역으로서 무주의 소천역, 용담의 달계역, 진안의 단령역, 고산의 옥포 역을 관할하였다)이 있던 곳이다. 여기에서 효종임금때 찰방으로 있던 미수 허목(眉璟 許穆)선생이, 바위벽에 쓴 어풍대(御風臺)라는 글에서 지명을 얻은 이곳은, 긴 구릉지의 남단 바위벼랑이다.

그 한쪽엔 여기서 고을살이하던 분들의 공덕비가 모인 비석거리이고, 왼쪽 벼랑에는 인조 때, 이름높은 청백리 천연제 이상형(天然齋 李尙馨)이 쓴, 세마지(洗馬池)라는 글이 있어서 한때, 여기가 물이 있던 곳임을 알게 한다.

지금은 물길을 돌리고 매립되었으며, 매립전의 물길은 길 건너편의 봉황천으로 흘러 금강으로 들어간다.

이곳에 있던 큰못을 제원역에서는 말 씻는 못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곳이 마을 사람들의 놀이터라, 여기에 화가 난 한 청년이 홧김에 불을 질러 버리자, 때맞춰 불어온 강풍으로 엄청 번진 불길은 역마들이 연못에 뛰어 들게 하여, 모두 죽어 버렸다 한다. 이일 이 후부터 제원은 해마다 같은 때가 되면, 서북풍이 거세게 불고 불이 자주 일어나서 민심마저 나빠졌다. 이에 허미수 선생께서 풀이하기를, 말죽은 귀신의 조화와 바람 신을 모시지 않는 탓이라 하여, 세마지를 메우고 어풍대라 글을 새겼다. 이후, 다시 마을은 안정을 되찾았다고 하며, 그곳에 거북바위가 있다.

높이 7m여의 ‘어풍대’ 암벽을 오르면, 그 위에 누운 작은 바위가 있어서 한눈에 범상치 않은 면모가 있다. 길이 5m여의, 동서로 놓인 이 바위는 거북의 몸과 머리가 확연하다.

머리에는 얼굴을 인공으로 새겨 놓았다. 큰 눈을 나타내는 바위구멍 두 개, 콧구멍. 가로로 그어놓은 입이 어울려 바야흐로 거북의 용모를 구색한다.

입에는 이빨처럼 5개의 세로 선을 새겨 칸을 지었다.

거북바위의 입지를 볼작시면, 앞은 협소하여 뒤로 물러서서 보기는 쉽지 않다.

튼실한 몸체는 완만하게 머리와 몸이 자연히 구분되고 있으나, 보다 분명히 하고자 거칠게 쪼은 흔적이 있다. 머리는살풋 들어서 남쪽을 본다.

시선은 외로 돌아본다. 이것은 얼굴을 머리의 오른쪽인 남쪽 면에 새기므로 그렇게 보이게 되었다.

엉덩이에는 움푹 패인 홈을 새겼다. 돌 의자 인 듯도 하고 동이와도 같은 바위구멍의 한 면을 깍아 낸 듯 한 이것은, 위에 무언가를 앉힐 수 있는 형태이다. 보다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하겠다.

사실, 이와 같은 홈은 이제까지 글쓴이의 바위나 고인돌 조사에서 가끔 보던 것으로서, 규모가 크고,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바위들에서 가끔 발견하는 현상이다.

어떤 것들은 ‘삼신할머니’나 ‘애기장수’ 설화와 같은 내용이 서려있는 것도 있다. 그러한 흔적을 애기장수의 엉덩이 자국이라든가 하는 식의 설화로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인도네시아 등지의 동남아 서부지역 거석문화에는 좌기자상신좌(座奇子狀神座)라 이르는 신들을 모셔 앉히는 그런 유적이 있다. 이러한 홈이 구조화된 문화의 한 형태라면 남방지역의 해양을 통한 문화교류와 견주어 볼 수 있다.

거북의 등 짝과 주위의 바위에도 십 수 점의 바위구멍을 새겼다.

그 뒤로는 구릉으로 이어진다.

이리로 오르면 충북과 충남을 잇는 서대산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여기에 거북의 길상을 본, 어떤 이의 무덤이 한가롭다.

이제 막 오수에서 벗어나 돌아갈 물때를 본다. 거북바위는 그런 자세이다.

바위구멍은 마치, 천년의 세월인양 그 흔적인양 오히려 태평하고, 살풋 들어올린 고개에는 게으름이 묻어있다.

왜정 때 돌렸다는 물길은 이미 저만큼 물러나 있다.

<이하우 암각화 연구가>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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